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중 최고 걸작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작품입니다. 대체적으로 저는 추리 소설을 읽으며 작가와의 대결을
즐기는 타입의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범인이 누군지 알아맞추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간에 황당하다거나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하고 머리를 흔들지는 않습니다만, 어쨌거나 이 소설의 경우에는 본의아니게 다른 형식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건 제게 그렇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도 너무 강력한 힌트가 되니까 그 이야기는 좀 아래에서 하기로 하죠. (숨겨놓을 테니 보고 싶지 않으셔도 걱정 하실 것 없습니다)
일단 이 소설에 대해서 간단히 말해 보면, 추리하는 재미가 충분한 작품입니다. 상당히 교묘하게 짜여진 글이고, 아래에서 언급할「ㅂ」소설처럼 눈에 띄이는 힌트를 쉽게 주지도 않습니다. 사실 제가 얻은 힌트는 글 내에서가 아니라 글 외의 환경에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범인을 알아내기 쉬웠죠. 말하자면, 순수하게 글만 보면서 범인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십중팔구는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이미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의 감상이 있기 때문에 범인 찾기가 쉬워지죠. 이 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한다면 그게 상당히 큰 힌트가 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의 재미를 위해 기본적으로는 힌트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1. 애당초 이 소설에 대해 Phyllion형에게 언질을 들은 바 있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람이 나온다고.
2. PaleSara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이 소설을 아직 안 읽었다고 말하자,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읽었으면서 어째 이건 안 읽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벚꽃..'은 1인칭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트릭이 채용된 추리소설인데, 그런 류의 원류라는 말을 들었지요.
3. 제가 본 건 해문판인데, 속지에 이런 광고 문구가 있습니다. '이 작품보다 더 완벽한 추리 소설은 없다! -세계의 모든 추리 작가들이 주저하지 않고 인정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최고 야심작. 자살한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 속에 튀어나온 기상천외한 죽음! 살인-자살-음모-살인-자살의 악순환이 끝없이 이어지는 범죄의 고리 속에서 로저 애크로이드는 두번 죽는다. 생명 없는 허수아비처럼. 마지막 장에서 범인의 정체가 밝혀질 때 독자들은 모두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게 된다- 범인은 바로 독자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M_그리고 이건 그 힌트로부터 도출된 답안입니다. 말 그대로 '범인'입니다.|접기|1
의 힌트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범인이 밝혀질 때 독자에게 가장 예상외여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2의 힌트를 보면, 1인칭
소설이기 때문에 사각지대에 존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3의 힌트는, 정말 생각 없는 광고 문구인데, 이게 1인칭 소설이고
범인이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인데다 '범인은 바로 독자들 자신'이라고 할 때, 범인은 당연히 1인칭 소설의 화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만큼 상상하기 어려우며 범인이 밝혀졌을 때 독자들이 충격을 받으며 사용된 트릭이 사람들에게 '이건
불공평하다'는 말이 나올 만한 인물은 없죠. 따라서 저는 이 소설의 첫장을 여는 순간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 버렸습니다.
(...)
물론 이 속지를 보고 "어라, 이거 화자가 범인인 거 아니냐?"하고 물었을 때 PaleSara는 제 말을 부정했습니다만,
모든 정황 (...)이 1인칭 화자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PaleSara가 거짓말을 한 거라는 전제 하에 책을
읽었습니다. 뭐 그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그토록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기가
힘들어지고 당초 힌트 2의 발언과 모순됩니다. 그러니 결론은 버킹검 .. 1인칭 화자.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 짐작하고 봐도,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지 살펴보며 가는 재미도 있으니 괜찮았습니다. 아무 힌트 없이 봤다면 정말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을 지도 모르겠군요. 확실히 잘 쓰여진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