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지음, 박기반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이 소설에는 우편배달부가 나오지 않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있고 그녀와 불륜의 관계가 된 남성이 있는데 그 둘이 짜고서 여자의 남편을 죽이려 든다는 기본 줄거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남성이 우편배달부이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소설 전체를 통틀어 우편배달부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습니다. 스쳐지나가는 대사로조차 없죠. 때문에 그냥 책을 읽고서는 이것이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 이해하기가 난해합니다.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에는 마지막 대사로 의미 깊게 쓰였다고 합니다만, 저는 영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 대사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언급해 보기로 하죠.
이 DMB판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에는 케인의 두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우편배달부는 벨을 울린다>이며 또 하나는 <이중보상>입니다. <이중보상> 쪽이 좀 더 분량이 많습니다. 두 소설은 여러 모로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여자와 짜고 여자의 남편을 죽이려 드는 남자가 나온다는 것과 그 남자가 1인칭 화자가 되어 사건을 설명해 간다는 점이 일단 눈에 띄는 공통점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이 두 소설은 거의 같은 테마를 보이고 있고, 따라서 한데 묶어서 보아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케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면 이 사람은 하드보일드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입니다. 사실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몰라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제목은 한 번쯤 들어보셨지 않았을까 싶군요. <이중보상>의 경우는 챈들러가 영화를 위해 각색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감상을 위해 잠깐 웹을 돌아보았는데, 보통 하드보일드의 삼대 대가 하면 더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그리고 로스 맥도널드를 꼽습니다만 어떤 글에서는 로스 맥도널드를 넣지 않고 이 제임스 케인을 들더군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 케인의 소설이 한 번쯤 읽어 볼 가치가 있다고는 말해도 좋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일단 이 소설은 꽤 거북합니다. 무엇이 거북하냐 하면 범죄자가 '나'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불륜이 일어나고, 그 욕망 때문에 여자의 남편을 (계획적으로 수단을 짜서) 살해합니다. 전개 자체는 쉽게 볼 수 있는 범죄소설의 그것입니다만 화자가 일인칭이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 힘듭니다. 물론 이 글은 하드보일드라, 자신의 감정이나 사상을 화자가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말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거북하게 읽히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욕망 때문에 망가져버린 인간이 주인공이 되고 그게 일인칭이면 읽는 사람으로서는 거북함을 느낄 수 있게 되죠. 그러나 정말로 거북한 때는 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범죄를 저질렀고 충분히 벌을 받아 마땅할 사람임에도 그가 원하는 대로 잘 풀려 주기를 바라는 '나 (독자)'를 발견할 때입니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건간에 그것이 나와 관계없는 타인일 경우에나 욕하기 쉽지 '내'가 되어 버리면 그게 어려워집니다. 하기는 피카레스크 소설 같은 것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뻔뻔해지기에는 주인공이 약합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지르고부터가 문제입니다. 나는 진상이 밝혀질까 두려움에 떨 수도 있으며 나와 같이 범죄를 저지른 그녀가 변심할까 의심할 수도 있으며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나 <이중보상>이나, 살인까지는 서슴지 않고 저지르지만 그 후에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받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별로 고통받지 않을 것 같기야 합니다만, 어쨌거나 누구에게든 들키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범죄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 두 편에서는, 살해당한, 여자의 남편이 가장 불쌍합니다. 그는 호인이고 아내에게도 그 아내의 정부에게도 잘 해주었죠. 그러나 그의 아내와 정부는 돈 혹은 욕정으로 인해 그를 배반하고 그를 살해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호인임에도 불합리한 고통을 받는 일도 생깁니다. 그러나 그게 세상인 법이죠. 좋은 사람이 항상 보답받는다면 이 세상이 이미 천국이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악인의 결말이 결코 좋지 않으며 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려 생각했지만 범죄를 저지른 순간부터 이미 행복해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것이 그리 다행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악행을 저지르고도 행복하다는 것은 그다지 축복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요)
결국 행복이란 타인을 짓밟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는 것은 신체가 느끼는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당장 고통스러워서 불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있으므로 정말 큰 것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주인공 프랭크와 콜라의 사랑은, 아무리 미사여구로 포장한다 해도 결국 불륜 (不倫)이며 악행이었습니다. 당신들이 가는 그 길은 위험하다고 빨간 신호등이 켜져도 그들은 신호등을 부수어 버리고 종말로 돌진해 갔습니다. 타인을 짓밟으며 가지는 것은 사랑도 뭣도 아닙니다. 인간의 추악하고 타락한 욕망일 뿐이죠. -이 감상 초반에서 언급했던, 영화의 대사란 이러하다고 합니다. "우체부는 항상 벨을 두 번 울린다는 것을 모르죠. 콜라를 위해서도 두 번, 나를 위해서도 두 번 울렸어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소리는 다 듣게 된다는 거죠."
제임스 M. 케인 지음, 박기반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이 소설에는 우편배달부가 나오지 않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있고 그녀와 불륜의 관계가 된 남성이 있는데 그 둘이 짜고서 여자의 남편을 죽이려 든다는 기본 줄거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남성이 우편배달부이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소설 전체를 통틀어 우편배달부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습니다. 스쳐지나가는 대사로조차 없죠. 때문에 그냥 책을 읽고서는 이것이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 이해하기가 난해합니다.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에는 마지막 대사로 의미 깊게 쓰였다고 합니다만, 저는 영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 대사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언급해 보기로 하죠.
이 DMB판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에는 케인의 두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우편배달부는 벨을 울린다>이며 또 하나는 <이중보상>입니다. <이중보상> 쪽이 좀 더 분량이 많습니다. 두 소설은 여러 모로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여자와 짜고 여자의 남편을 죽이려 드는 남자가 나온다는 것과 그 남자가 1인칭 화자가 되어 사건을 설명해 간다는 점이 일단 눈에 띄는 공통점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이 두 소설은 거의 같은 테마를 보이고 있고, 따라서 한데 묶어서 보아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케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면 이 사람은 하드보일드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입니다. 사실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몰라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제목은 한 번쯤 들어보셨지 않았을까 싶군요. <이중보상>의 경우는 챈들러가 영화를 위해 각색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감상을 위해 잠깐 웹을 돌아보았는데, 보통 하드보일드의 삼대 대가 하면 더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그리고 로스 맥도널드를 꼽습니다만 어떤 글에서는 로스 맥도널드를 넣지 않고 이 제임스 케인을 들더군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 케인의 소설이 한 번쯤 읽어 볼 가치가 있다고는 말해도 좋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일단 이 소설은 꽤 거북합니다. 무엇이 거북하냐 하면 범죄자가 '나'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불륜이 일어나고, 그 욕망 때문에 여자의 남편을 (계획적으로 수단을 짜서) 살해합니다. 전개 자체는 쉽게 볼 수 있는 범죄소설의 그것입니다만 화자가 일인칭이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 힘듭니다. 물론 이 글은 하드보일드라, 자신의 감정이나 사상을 화자가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말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거북하게 읽히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욕망 때문에 망가져버린 인간이 주인공이 되고 그게 일인칭이면 읽는 사람으로서는 거북함을 느낄 수 있게 되죠. 그러나 정말로 거북한 때는 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범죄를 저질렀고 충분히 벌을 받아 마땅할 사람임에도 그가 원하는 대로 잘 풀려 주기를 바라는 '나 (독자)'를 발견할 때입니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건간에 그것이 나와 관계없는 타인일 경우에나 욕하기 쉽지 '내'가 되어 버리면 그게 어려워집니다. 하기는 피카레스크 소설 같은 것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뻔뻔해지기에는 주인공이 약합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지르고부터가 문제입니다. 나는 진상이 밝혀질까 두려움에 떨 수도 있으며 나와 같이 범죄를 저지른 그녀가 변심할까 의심할 수도 있으며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나 <이중보상>이나, 살인까지는 서슴지 않고 저지르지만 그 후에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받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별로 고통받지 않을 것 같기야 합니다만, 어쨌거나 누구에게든 들키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범죄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 두 편에서는, 살해당한, 여자의 남편이 가장 불쌍합니다. 그는 호인이고 아내에게도 그 아내의 정부에게도 잘 해주었죠. 그러나 그의 아내와 정부는 돈 혹은 욕정으로 인해 그를 배반하고 그를 살해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호인임에도 불합리한 고통을 받는 일도 생깁니다. 그러나 그게 세상인 법이죠. 좋은 사람이 항상 보답받는다면 이 세상이 이미 천국이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악인의 결말이 결코 좋지 않으며 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려 생각했지만 범죄를 저지른 순간부터 이미 행복해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것이 그리 다행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악행을 저지르고도 행복하다는 것은 그다지 축복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요)
결국 행복이란 타인을 짓밟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는 것은 신체가 느끼는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당장 고통스러워서 불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있으므로 정말 큰 것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주인공 프랭크와 콜라의 사랑은, 아무리 미사여구로 포장한다 해도 결국 불륜 (不倫)이며 악행이었습니다. 당신들이 가는 그 길은 위험하다고 빨간 신호등이 켜져도 그들은 신호등을 부수어 버리고 종말로 돌진해 갔습니다. 타인을 짓밟으며 가지는 것은 사랑도 뭣도 아닙니다. 인간의 추악하고 타락한 욕망일 뿐이죠. -이 감상 초반에서 언급했던, 영화의 대사란 이러하다고 합니다. "우체부는 항상 벨을 두 번 울린다는 것을 모르죠. 콜라를 위해서도 두 번, 나를 위해서도 두 번 울렸어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소리는 다 듣게 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