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시공사
패닉의 노래에 <로시난테>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상을 꿈꾸며 이상 속에서 살았던 인물인 돈 키호테 (Don Quixote)의 바짝 마르고 인내심 강한 말 이름으로, 패닉은 <돈키호테>로부터 그 이름을 끌어내어 가사를 만들었지요. 설령 <돈키호테>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해도 그 이름만은 모두들 아실 겁니다. 당시에 흔하던 기사도 소설을 패러디한 유쾌한 소설 정도로 당초에는 알려졌으나 요즘에 와서는 돈키호테는 이상주의적 인물로 그 종자인 산초 판사는 현실주의적 인물로 바라보고 또한 이 소설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심도 있게 읽어 새로이 감명받고 있지요. 사실 <돈키호테>는 심오한 글이며, 어린이가 읽으면 어린이대로 재미있고 청년이 읽으면 청년대로 재미있으며 장년이나 노인이 읽으면 또한 새로이 읽힐 만한 그러한 소설입니다. 한 권쯤 사 두고 잊혀질 만 하면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울 그런 책이지요.
제가 산 것은 -정확히 말하면 금년 제 생일 때에 형균이에게서 선물 받은 것은- 시공사의 완역판 <돈키호테>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완역판은 없었습니다만 (초등학교 때 처음 읽었는데, 그것도 어린이용은 아니라 꽤 긴 편이었지만 지금 완역판을 읽어 보니 확실히 내용이 좀 빠졌더군요. 하긴 단순히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몇 개의 출판사에서 완역판이라고 낸 것이 있기 때문에 무얼 골라야 할 지 고민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이걸 고른 이유는 조금 단순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저는 역자 소개를 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골랐습니다. 말인즉슨 책 뒤의 역자 소개를 보면 이러합니다.
딱히 이 역자를 광고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여하간 이런 소개를 보고 제가 느낀 건 딱 이겁니다: '우와 이거 돈키호테 오타쿠다' 이만큼이나 오덕정신이 살아 숨쉬는 소개를 보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애정이 넘쳐나는 번역을 했을 것이 틀림없기에 별로 고민도 안 하고 집어들었습니다. 동시에, '이 사람 오덕오덕하다라는 이거, 감상할 때 꼭 써야지'라고 생각했음도 물론입니다. 번역 이야기를 하는 김에 하나만 더 말해 보면, 이 책의 번역 원서는 비센테 가오스의 스페인어판 돈키호테라고 하며 원본 1판을 기본으로 한 모양입니다. '이 부분은 세르반테스의 오류이며 2판에서 정정되었다'는 식의 역주가 간간히 들어가더군요. 중간중간 구스타브 도레 (Gustave Doré)의 고품질 삽화도 삽입되어 있는데 확실히 눈이 즐겁더군요. 더불어 이 책, 심지어 (원본에서의) 가격 증명과 오류 검증서, 국왕의 칙허장까지 번역해 놨습니다. 굉장히 굉장해요.
<돈키호테>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일단 이 이야기는 기사도 소설을 읽고 그 부분에서만 정신이 나가 버린 한 귀족이 우리의 편력기사 돈키호테가 되어 세상에 나가 벌이는 유쾌한 모험담이라고 압축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돈키호테는 기사도 모험에 관련된 부분에서만 광기를 보일 뿐이며 다른 부분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인물입니다) 첫번째 모험에서는 금방 잡혀 돌아오지만 두 번째 모험에서는 근처의 농부 산초 판사를 꼬셔서 그를 종자로 삼고 나가 벌이는 일들을 보여 주고, 이 두 번째 모험까지가 <돈키호테> 1편이며 제가 산 시공사의 <돈키호테>는 이 1편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돈키호테의 모험담이 주가 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이 소설은 일종의 액자 소설 같은 구성을 취하여, 소설 내의 중요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혹은 소설 내에서도 '이야기'라고 확실하게 밝히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삽입하고 있습니다. <돈키호테>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에 서브 폴더가 들어가는 식이지요. 그러나 이 단편이라면 단편이랄 이야기들이 아예 따로 놀지 않고 소설 자체와 유기적으로 잘 연동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돈키호테>에서는 단순히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당대의 귀족, 성직자, 권력을 가진 많은 이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다층의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그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으며, 돈키호테는 그런 사람들 사이를 스쳐지나게 됩니다. 그들이 들려 주는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불합리함'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분노를 읽을 수 있지요. 이를테면 12-13장에 나오는 마르셀라 이야기를 보면 남자가 절실하게 구애한다고 해서 꼭 여자가 받아들일 의무가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런 구애를 거절한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를 욕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당장 우리 주위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저 시대에,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면 재판조차 없이 그냥 처벌할 수 있었던, 여자의 인권이라는 것이 희박했던 그 시대에 했다는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합리함에 대한 여러한 성토가 돈키호테의 여정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사실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검열에 의해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때였기 때문에 세르반테스는 이 글의 작자가 자신이 아니라 실은 다른 사람의 원작이 있고 자신은 그저 말을 옮길 뿐이라고 소설 중간중간 너스레를 떱니다. 해설에서는 돈키호테를 광인으로 만든 것도 그저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이유에서였다고 설명하더군요.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돈키호테>가 단순히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고는 말했습니다만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어쩐지 이 기사도 소설에 대한 풍자가, 현재 장르 소설에도 그대로 대입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소설에서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찬미하며, 심지어 그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 소설들로 인해 사람들이 기쁨을 누리고 감탄할 수 있으리라며 기사도 소설을 옹호합니다만, 주위 사람들은 돈키호테가 광인이 된 것을 보며 거짓으로 가득한 기사도 소설이 옳지 않다고 말하게 되지요. 저로서는 둘 다 맞는 말이라고 봅니다. 다만 어느 쪽에건 정도를 넘어서면 곤란하겠죠.
그런데 그 당시의 기사도 소설에 대해 세르반테스가 48장에서 교회법 연구원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어 팔아먹는 일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감탄마저 들더군요.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아는 것이 없으며 대충 만들어 팔아먹는 사람들에 관해서입니다. 그 말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조금 인용한다고 해놓고서 막상 인용하다 보니 꽤 길어졌습니다만, 작품을 쓴다고 말하는 작가려면 모두들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이후로도 세르반테스는 이 남자의 입을 통해 거짓과 무지, 오류가 판치고 그것이 당연한 듯이 이해되는 상황을 개탄했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 작가들의 잘못입니다. 저 역시 저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사실 이 <돈키호테>를 읽고, 어떤 부분에서든 찔림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찔림으로 세르반테스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고쳐야 옳을 겁니다. 다만 사람이란 자신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는 법이라 세르반테스도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글을 옮겨 쓰는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긴 합니다만. (그 시대야 문자 그대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돈키호테>는 단순히 기사도 소설에 미쳐버린 광인의 유쾌한 모험담이 아닙니다. 그저 이상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만을 그려내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이 작품을 세상에 가득한 불합리를 성토하는 목소리로도 읽었습니다. 좀 더 시일이 흐른 후 다시 읽게 되면 어떻게 읽힐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시공사
패닉의 노래에 <로시난테>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상을 꿈꾸며 이상 속에서 살았던 인물인 돈 키호테 (Don Quixote)의 바짝 마르고 인내심 강한 말 이름으로, 패닉은 <돈키호테>로부터 그 이름을 끌어내어 가사를 만들었지요. 설령 <돈키호테>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해도 그 이름만은 모두들 아실 겁니다. 당시에 흔하던 기사도 소설을 패러디한 유쾌한 소설 정도로 당초에는 알려졌으나 요즘에 와서는 돈키호테는 이상주의적 인물로 그 종자인 산초 판사는 현실주의적 인물로 바라보고 또한 이 소설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심도 있게 읽어 새로이 감명받고 있지요. 사실 <돈키호테>는 심오한 글이며, 어린이가 읽으면 어린이대로 재미있고 청년이 읽으면 청년대로 재미있으며 장년이나 노인이 읽으면 또한 새로이 읽힐 만한 그러한 소설입니다. 한 권쯤 사 두고 잊혀질 만 하면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울 그런 책이지요.
제가 산 것은 -정확히 말하면 금년 제 생일 때에 형균이에게서 선물 받은 것은- 시공사의 완역판 <돈키호테>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완역판은 없었습니다만 (초등학교 때 처음 읽었는데, 그것도 어린이용은 아니라 꽤 긴 편이었지만 지금 완역판을 읽어 보니 확실히 내용이 좀 빠졌더군요. 하긴 단순히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몇 개의 출판사에서 완역판이라고 낸 것이 있기 때문에 무얼 골라야 할 지 고민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이걸 고른 이유는 조금 단순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저는 역자 소개를 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골랐습니다. 말인즉슨 책 뒤의 역자 소개를 보면 이러합니다.
박 철_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학과를 졸업하고 마드리드국립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대학교 로망스어학부 초빙교수를 지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학과 교수로, BK21 세르반테스 연구팀장과 한국스페인어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세계세르반테스학회, 세계스페인어문학회, 스페인황금세기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돈키호테』발간 400주년 기녕 제11차 세계세르반테스 국제학술대회를 서울에 성공적으로 유치했으며, 스페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기사장'을 받았다.
딱히 이 역자를 광고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여하간 이런 소개를 보고 제가 느낀 건 딱 이겁니다: '우와 이거 돈키호테 오타쿠다' 이만큼이나 오덕정신이 살아 숨쉬는 소개를 보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애정이 넘쳐나는 번역을 했을 것이 틀림없기에 별로 고민도 안 하고 집어들었습니다. 동시에, '이 사람 오덕오덕하다라는 이거, 감상할 때 꼭 써야지'라고 생각했음도 물론입니다. 번역 이야기를 하는 김에 하나만 더 말해 보면, 이 책의 번역 원서는 비센테 가오스의 스페인어판 돈키호테라고 하며 원본 1판을 기본으로 한 모양입니다. '이 부분은 세르반테스의 오류이며 2판에서 정정되었다'는 식의 역주가 간간히 들어가더군요. 중간중간 구스타브 도레 (Gustave Doré)의 고품질 삽화도 삽입되어 있는데 확실히 눈이 즐겁더군요. 더불어 이 책, 심지어 (원본에서의) 가격 증명과 오류 검증서, 국왕의 칙허장까지 번역해 놨습니다. 굉장히 굉장해요.
<돈키호테>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일단 이 이야기는 기사도 소설을 읽고 그 부분에서만 정신이 나가 버린 한 귀족이 우리의 편력기사 돈키호테가 되어 세상에 나가 벌이는 유쾌한 모험담이라고 압축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돈키호테는 기사도 모험에 관련된 부분에서만 광기를 보일 뿐이며 다른 부분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인물입니다) 첫번째 모험에서는 금방 잡혀 돌아오지만 두 번째 모험에서는 근처의 농부 산초 판사를 꼬셔서 그를 종자로 삼고 나가 벌이는 일들을 보여 주고, 이 두 번째 모험까지가 <돈키호테> 1편이며 제가 산 시공사의 <돈키호테>는 이 1편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돈키호테의 모험담이 주가 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이 소설은 일종의 액자 소설 같은 구성을 취하여, 소설 내의 중요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혹은 소설 내에서도 '이야기'라고 확실하게 밝히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삽입하고 있습니다. <돈키호테>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에 서브 폴더가 들어가는 식이지요. 그러나 이 단편이라면 단편이랄 이야기들이 아예 따로 놀지 않고 소설 자체와 유기적으로 잘 연동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돈키호테>에서는 단순히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당대의 귀족, 성직자, 권력을 가진 많은 이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다층의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그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으며, 돈키호테는 그런 사람들 사이를 스쳐지나게 됩니다. 그들이 들려 주는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불합리함'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분노를 읽을 수 있지요. 이를테면 12-13장에 나오는 마르셀라 이야기를 보면 남자가 절실하게 구애한다고 해서 꼭 여자가 받아들일 의무가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런 구애를 거절한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를 욕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당장 우리 주위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저 시대에,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면 재판조차 없이 그냥 처벌할 수 있었던, 여자의 인권이라는 것이 희박했던 그 시대에 했다는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합리함에 대한 여러한 성토가 돈키호테의 여정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사실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검열에 의해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때였기 때문에 세르반테스는 이 글의 작자가 자신이 아니라 실은 다른 사람의 원작이 있고 자신은 그저 말을 옮길 뿐이라고 소설 중간중간 너스레를 떱니다. 해설에서는 돈키호테를 광인으로 만든 것도 그저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이유에서였다고 설명하더군요.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돈키호테>가 단순히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고는 말했습니다만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어쩐지 이 기사도 소설에 대한 풍자가, 현재 장르 소설에도 그대로 대입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소설에서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찬미하며, 심지어 그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 소설들로 인해 사람들이 기쁨을 누리고 감탄할 수 있으리라며 기사도 소설을 옹호합니다만, 주위 사람들은 돈키호테가 광인이 된 것을 보며 거짓으로 가득한 기사도 소설이 옳지 않다고 말하게 되지요. 저로서는 둘 다 맞는 말이라고 봅니다. 다만 어느 쪽에건 정도를 넘어서면 곤란하겠죠.
그런데 그 당시의 기사도 소설에 대해 세르반테스가 48장에서 교회법 연구원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어 팔아먹는 일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감탄마저 들더군요.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아는 것이 없으며 대충 만들어 팔아먹는 사람들에 관해서입니다. 그 말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략) ···· 다수의 무지한 이들에게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소수의 박식한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좋은 일이지만, 저는 기사도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의 혼란한 판단에 휩쓸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의 손을, 아니 이야기를 끝까지 쓰고자 하는 생각을 제게서 빠앗아간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상영되고 있는 연극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 연극이건 상상적인 내용의 연극이건, 요즈음 상연되는 극작품들은 하나같이 엉터리이며, 머리와 다리가 없는 것과 같고, 특히 이런 종류의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나 재미로 듣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나 같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나 그것을 공연하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대중들이 그런 이야기를 원하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예술이 요구하는 대로 구성된 이야기는 그것을 이해할 만한 분별력이 있는 네 사람 정도에게나 통하지 그 외 사람들에게는 그런 기술 같은 것이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소수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많은 이들로부터 돈벌이를 하고 싶어한다. 책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므로 결국에는 내가 앞서 말한 규율을 지키고자 기를 쓰고 연구해봤자 헛수고만 할 뿐이다.' 배우들에게 그들이 잘못 판단하고 있고, 예술의 규율에 맞춰서 연극을 공연하면 더 좋은 평판을 얻고 관객들도 더 많이 찾아올 거라고 설득해보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 있어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지요. 한번은 고집불통 작가 한 사람을 붙들고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이봐요, 우리 스페인의 한 유명 시인이 지은 세 편의 비극이 상연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무지한 사람이건 박식한 사람이건 시민이건 귀족이건 간에 이것을 본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경탄한 덕에 이후 공연된 30편의 다른 연극으로 올린 수익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던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분명히 기억하지요.' 그 작가가 대답하더군요. '아마도 『라 이사벨라』, 『라 필리스』, 그리고 『라 알렌한드로』였을 겁니다.'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런 작품들이 예술의 원칙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한번 보세요. 즉 엉터리 이야기를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줄 모르는 작가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 (후략)"
<돈키호테>, 667-668p
조금 인용한다고 해놓고서 막상 인용하다 보니 꽤 길어졌습니다만, 작품을 쓴다고 말하는 작가려면 모두들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이후로도 세르반테스는 이 남자의 입을 통해 거짓과 무지, 오류가 판치고 그것이 당연한 듯이 이해되는 상황을 개탄했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 작가들의 잘못입니다. 저 역시 저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사실 이 <돈키호테>를 읽고, 어떤 부분에서든 찔림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찔림으로 세르반테스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고쳐야 옳을 겁니다. 다만 사람이란 자신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는 법이라 세르반테스도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글을 옮겨 쓰는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긴 합니다만. (그 시대야 문자 그대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돈키호테>는 단순히 기사도 소설에 미쳐버린 광인의 유쾌한 모험담이 아닙니다. 그저 이상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만을 그려내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이 작품을 세상에 가득한 불합리를 성토하는 목소리로도 읽었습니다. 좀 더 시일이 흐른 후 다시 읽게 되면 어떻게 읽힐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