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의뢰인을 기다리려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지루해지면 나는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걷곤 한다. 때로는 사람들이 살아 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는 법이다.

빌런트 시의 여름은 그리 덥지 않다. 온도가 낮은 편은 아니지만 습도가 낮은데다 평원 저 편으로부터 불어 오는 시원한 바람이 몸을 식혀 주기에 비교적 쾌적한 편이다. 거기에 지금은 아직 초여름이며 그다지 덥다고 말할 정도도 아니다. 조금 더 더워지면 적절하게 우기가 찾아오며, 뜨거워진 지면은 차가운 비에 의해 냉각된다. 이곳에서는 여름이라 해도 부채를 가진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러니 이 초여름의 한낮에조차 이 상업도시의 거리가 활기로 넘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그레이치 구 4번가에서만도 수백 명은 되는 상점 주인들이 자기 가게로 손님을 끌기 위해 맹렬한 호객행위를 펼쳤고 또한 그 수백 배는 될 수의 손님들이 더 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발품을 팔고 다녔다. 이 동네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는 치이거나 밀려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동하기 일쑤다. 나는 두 번 어깨를 부딪히고 여섯 번 발을 밟힌 끝에 상업가를 빠져나와 식당가로 접어들었다.

식당가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될 만큼은 한산했다. 문을 열어 둔 식당으로부터 튀긴 밀가루와 야채 냄새나 코를 찌르는 향신료 냄새, 또는 향긋한 토마토 소스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간혹 향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손님들이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오늘 마른 빵 하나를 먹었을 뿐이었다.

나는 간판이 오래 된 식당을 택해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도 의자도 낡아 번들거렸지만 손님을 받는 목적을 충실히 수행해낼 만큼은 튼튼했다. 식사비를 지불하자 수염이 희끗한 요리사가 피망이 섞인 토마토 소스를 탄력 있는 면에 비벼 내왔다. 나는 포도주는 주문하지 않았다. 접시가 바닥을 보일 때쯤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바깥을 돌아보았다.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바닥을 헤엄치고 있었다.

식사는 시키지 않고 하루종일 술만 계속 주문했던 것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입고 있는 회색 외출복은 구김마다 검게 때가 탔고 군데군데 얼룩져 젖소 가죽처럼 보였다. 머릿기름으로 엉겨붙은 회갈색 머리칼은 삼백 년 전부터 그런 형태였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 면발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나서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맥주 통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냄새가 지독했다. “이봐요.” 그를 부르자 그는 흐리멍텅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보기보다 얼굴이 깨끗한 남자였다. 그는 갸름하고 선이 가는 턱을 가졌고 수염은 코 주위와 턱 밑에만 나 있었다. 내가 말을 걸었다.

“이 주위는 헤엄을 칠 만큼 술이 충분치는 않은 것 같군요.”

그는 내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댓 명 정도 되는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값을 마저 받고 싶어하는 술집 주인은 없었다. 그렇더라도 이 사람이 오늘 안으로 정신을 차릴 듯하지는 않았으니, 이대로 놔 두면 조만간 보안관이나 강도 둘 중 하나한테 잡혀 갈 것 같았다.

“당신 집에서라면 좀 더 마셔도 괜찮겠죠. 집이 어딥니까?”

내가 묻자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내가 세 명 이상으로 보이는 듯 했지만 나를 바라보려 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혀를 움직이는 방법을 반쯤 잊어버린 것처럼 말했다.

“여기가 집이오.”

그는 이 말이 회심의 농담이기라도 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발작에 가까운 그 웃음은 터져나올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사그라들었다. 그는 술기운을 떨치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덥군.”

그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의 다리는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었던 듯했다. 내가 그를 부축하자 “아, 고마워요.” 꼬부라진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그는 입김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취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술에 절어 있었다. 그러나 무척이나 가벼웠다.

“당신 집이 어딥니까?”
“나는 집에 못 가요.”

그는 다시 웃다가 비틀거렸고, 나는 그를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팔에 힘을 넣었다. 그의 코에서 쌔근대는 소리가 났다. 그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관으로 데려다주시오.”

그가 말한 여관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작고 아담한 여관이었고, 여관 주인은 이 남자를 기억했다. 여관 주인은 이 남자를 로처 씨라고 불렀고, 그래서 나도 로처 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2층 그의 방으로 로처를 데리고 올라갈 즈음에는 로처의 다리에도 좀 더 힘이 돌아와서 이끌기가 쉬웠다. 침대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아담한 방이었다. 나는 로처를 침대에 눕혔다. 이 즈음에는 나도 힘이 꽤 빠졌기 때문에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쉬었다. 목재 바닥은 닳고 삐걱거렸고 곰팡이 냄새도 조금 났다.

“호의를 베풀어 주어서 정말 고맙소. 당신 이름이?”
“얀 트로닉.”
“트로익. 기억하도록 하겠소, 트로윅.”

기억하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지조차 의문이었다. 그가 누운 채로 부스럭거렸고, 그는 지푸라기 침대 안에서 술병을 하나 꺼냈다. 반쯤 남아 있는 위스키였다. 내가 조언했다.

“그 술을 먹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면 술이 좀 더 깬 다음에 마시는 게 좋을 겁니다.”
“괜찮소. 나는 말짱해요. 어, 그러니까, 쓰로윅 씨?”
“트로닉.”
“그래, 그래, 쓰로닉 씨. 당신도 같이 마시는 게 어떻소?”

로처는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벽을 기대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그처럼 쓰러질 일은 없었다.

“내 이름을 말했던가?”

내가 위스키를 마시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빈센트 로처요.”

목소리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발음이 뭉개져서 알아듣기는 쉽지 않았다. 술에 취해서이겠지만 그는 내가 그에게 해준 것 이상의 호의를 내게 가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두 모금 마시고 남은 위스키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양을 계산하기라도 하듯 위스키 병을 들여보다가 꿀꺽 소리를 내며 마셨다. 그는 흐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한때는 나도 잘 나갔었다오.”
“그래 보입니다.”

빈정대는 말은 아니었다. 이 남자는 뒷골목에서 구르기에는 아직 유약한 티가 났다. 나 같은 사람의 호의를 받아 본 일이 없었던 듯 보였지만 역으로 그럴 만한 일을 생기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으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로처는 한손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악기를 팔고 있었지. 한동안은 잘 나갔소. 아름다운 아내도 얻었으니까. 하지만, 뭐랄까, 과욕을 부렸던 게요.”

그는 장광설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말을 조리 있게 할 줄 아는 남자였다. 나는 그가 술에 취하지만 않았다면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잘 정리해 말했으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기야 술에 취하지 않았어도 이런 이야기를 내게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베르밀라라는 바이올린이 있소. 1세기 전의 명품 바이올린이지. 최고 명품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무척이나 알아 주는 바이올린이오.”

그는 트림을 했다.

“그래,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게지. 착각을 했던 게요. 수요가 있는 바이올린이나 잘 팔면 됐을 것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고 나서 버린 거요. 나는 돈을 빌려서 베르밀라를 샀소. 아니, 거기까지는 나쁘지 않았지. 한 개는 팔렸거든. 하지만 또 한 개가 안 팔렸던 거요.”
“고리대금업을 이용하셨군요.”

나는 조용히 말했고 그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필요했지. 개척은 언제나 모험인 법이니까. 베르밀라는 비싼 바이올린이었소. 안 팔리고 쌓여 있다면 그 자체로 부채가 될 만큼.”
“그 정도의 모험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모험? 아, 그래, 물론 있었지.”

그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지성이 알콜과 함께 뒤섞여 거의 다 휘발되어 가는 중이었지만 완전히 증발되지 않은 찌꺼기가 있었다. 나는 그 찌꺼기가 충분히 가라앉아 형태를 이룰 때까지 기다렸다. 로처가 말했다.

“부자가 될 필요가 있었거든. 부자 말이요. 부-우-자.”
“돈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누구나 돈을 사랑하오. 나도, 당신도, 여기 여관 주인도, 지나가는 행인 아무를 붙잡고 물어봐도 돈을 사랑한다고 답할 거요. 당연한 거지. 그건 사람은 다 그런 거요. 그러니까 내 아내도 돈을 사랑하지.”

나는 진작부터 로처의 왼손 약지를 눈치채고 있었다. 이 남자의 마디가 굵은 왼손가락에는 금속제 반지가 끼워졌는데 탁한 은색이었다. 은은 비싼 금속이지만 돈이 있다면 구하지 못할 금속도 아니다. 내 시선을 깨달은 듯 로처는 힐쭉 웃으며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내와 세트로 맞춘 거요. 결혼할 때. 그때 그녀는 정말로 예뻤지. 난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줄 수 있소. 정말이요. 이해할 수 있겠소?”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가 미소지었다.

“결혼한 이후 나는 이 반지를 한 번도 빼 본 적이 없고, 그건 아내도 그렇소.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나를 사랑하지. 아내는 나에게 정말 충실한 여자요. 그녀만큼 훌륭한 여자는 없거든.”

로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제 그는 몹시 우울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사랑에 보답하지 못했지.”

그는 다시 위스키를 목구멍으로 들이부었고, 더 이상 남은 술이 없음을 알게 되자 술병을 옆에 내려놓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 서슬에 술병이 넘어졌고 조금 옆으로 굴러가다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발을 움직여 술병이 내게까지 굴러오는 것을 막았다. 로처는 눈을 감고 있었다. 흥얼거리듯 그가 말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놈이요.”
“아내분께선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내 말이 그에게 들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고개를 약간 옆으로 떨구고 입속으로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챔버레인’이라는 단어가 두어 번 반복되어 들렸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태가 아닌 듯 했기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로처 씨. 너무 자신을 자책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사람이란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로처는 잠깐 눈을 떴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막연했다. 내가 방을 나가기도 전에 그가 침대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가자 여관 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조금 나오고 얼굴이 둥글게 생긴 중년 남자로 인상은 좋아 보였지만 자신이 받아낼 것을 잊어버릴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보더니 그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은 인정이 있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지요. 로처 씨는 당신의 호의에 기뻤을 겁니다.”
“저 남자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 묵고 있었습니까?”
“그렇게 오래는 아니지요. 고작 닷새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때는 지금보단 상태가 조금은 괜찮았지. 하지만 요 닷새간 한 거라곤 자거나 술을 먹거나 둘 중 하나 뿐이었으니 그 때 상태가 아무리 좋았어도 지금은 영 아니지요. 저야 숙박비만 제대로 내 준다면 관계없지만요.”
“돈이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니까 저 사람을 계속 우리 여관에서 자게 해 주는 거고. 헌데 당신은 돈도 안 받고 저 남자를 도와 준 거 같은데.”

그는 나에게 개인적인 흥미를 가진 듯이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눈에 밟히더군요.”
“상냥하군요. 요즘은 그런 사람이 흔치 않아요.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다 보니까.”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 나서 나는 여관을 나왔다. 여관 주인이 흥미로운 눈으로 내 등을 바라보는 것을 알았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나에게 흥미를 갖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자기 할 일이 바쁜 만큼 다른 사람에게 여력을 베풀지 못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빈센트 로처에 대한 친절도 여기까지였다. 나는 이 일에 대해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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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만 원고지 50장인, 기프트 에피소드 2의 첫 화입니다. 엄청나게 오래 기다리게 하는 기분도 들어서, 첫화만 맛뵈기로 살짝 공개해 봅니다. (이게 더 감질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핫핫)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