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계약은 못 했으나 가능성은 있습니다. 담당자 개인적으로는 제 글을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지만 그것만으로 편집장이나 사장을 납득시킬 수 없는 게 문제가 되겠지요. 일단 Neissy라는 작가는 대중적 인기를 끌 만한 글을 쓰는 스타일이 아니며 넷에서의 지명도도 거의 없는 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개척을 노리고 대여점보다 서점을 노릴 만한 글로 나간다면 결국 모험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시장개척과 대여점 시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가 알고 있는 사항을 간단히 말해 보겠습니다. 그 쪽 담당자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내용들입니다. 일단 이 판타지 소설 시장은 현재 좀 어긋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국에 깔려 있는 대여점에 '기본적인 물량은 깔린다'는 전제 하에 책을 써 내 출판하는데, 대여점이란 곳은 무한의 공간이 아닌지라 책을 진열할 곳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대여점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책이 계속 빌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재미없어서 잘 빌려가지 않는 글이라면 금방 반품되는 건 당연하고, 설령 재미있는 글이라 빌려가는 독자들이 있다 해도 그 책의 다음 권이 나오는 것이 늦어져서 텀이 길어지면 이제 볼 만한 사람은 다 봤고 더 이상 빌려가지 않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책을 들이려고 그 책을 반품해 버린다는 이야깁니다. 그 책의 다음 권이 나오고 인기가 있다면 재주문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바로 이게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마감이란 게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자기 책을 대여점에 계속 꽂혀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두세 달 안에는 다음 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죠.

말이 쉬워 두세 달입니다. 정말 정련되고 심도 있는 글을 쓸 생각이 있는 작가라면 두세 달에 한 권을 뽑아낸다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잘 알 겁니다. '그게 가능하냐'는 투로 물었더니 '다들 그렇게 한다'고 답하더군요. 그리고 그 답에 이 판타지 소설이 왜 양판소라며 욕을 들어먹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위에서는 두세 달이라고 써 놨습니다만 담당자는 '두 달'이라고 말했지요. 책은 쏟아져 나오고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두 달에 한 권 분량을 써낸다라,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그래서 제대로 글을 써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저는 조금 의문이 들더군요. 글을 써낸다기보다 작가를 짜낸다는 말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빌려 간다는 전제 하에 빌려 가기에는 적절한 품질의 글을 내놓고, 또한 그런 글들이 쏟아져 나오니 빨리빨리 내놓지 않으면 묻힙니다. 묻히기 싫으면 품질을 희생하더라도 적절한 속도를 내야 하죠. 이게 현재 판타지 소설 시장이랍니다. 팔릴 만한 퀄리티의 판타지 소설이 나오는 게 어려운 이유도 알 만 합니다.

각설하고 그런 이유로 <기프트>는 1권씩 차례차례 쓰는 대로 내는 게 불가능합니다. 내봤자 묻힌다는 거고, 그래서 나온 절충안은 일단 다 쓴 다음 몰아서 출판한다는 겁니다. 다만 그런 방법으로 출판한다고는 해도 제일 위에 쓴 대로 저는 원체 인지도가 없는 작가인데다, '빌려 보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편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라 '서점 라인'으로 갈 만한 퀄리티의 글이라는 걸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건 에피소드 1 분량만으로는 확신시키기 힘들다는군요. 그래서 에피소드 2 분량도 더해져서, 충분히 글의 성격을 알 만한 분량을 내 놓고 '모험을 걸 만한 수준이다'라는 정도의 설득력을 주어야 한다, 뭐 이런 상황이고 현재 저는 에피소드 2의 플롯을 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어차피 <기프트>가 출판한다고 해도 근시일 안에 보시는 건 힘들 테니까, 좀 천천히 기다리셔야 할 거다.. ..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 기회를 가능한 잡을 생각입니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글을 독자가 만족할 리 없다는 전제 하에 작가로서의 프라이드는 가지겠지만, 글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재미있고 흥미로워지기 위해서라면 겸허하게 충고도 받아들여 가며 쓸 겁니다. (라고는 말해도, 담당자 왈 자신이 본 중에 가장 고집 센 작가라더군요. 핫핫) 자, 아무튼 좀 더 고생할 생각입니다. 지금의 자신으로 통하지 않는다면 통하게 될 때까지 더 자신을 갈고 닦아야겠지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남의 돈 받아먹는다는 게 어디 쉽답니까.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