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화

오리지널/단상 2007. 6. 14. 19:12
점심 식사를 하고 간식과 함께 TV를 보며 어머니와 대화했다. 아니, 어머니와 대화하며 TV를 보았다, 는 쪽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워낙 TV를 보면서 그냥 안 보고 따지는 게 많은 성향의 나와 어머니는 죽이 잘 맞는다. 뭐, 오늘 포스팅의 '어떤 대화'를 TV를 보며 나온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건 아니고, 여하간 대화를 하는 중에 나온 이야기.

어머니: (너도 슬슬 나이가 되지 않았냐는 뉘앙스에서) 나이를 먹을 수록 연애하기 힘들어.
Neissy: 그렇죠 뭐.

사실 요즘 어머니께서 이런 류의 이야기를 간간이 하신다. 며칠 전에는 이를테면 이런 대화도 있었다.

어머니: 넌 여자친구 안 사귀니?
Neissy: 딱히 사람이 없어서요-. 어디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이 없잖아요.
어머니: 빨리 복학해야겠네.
Neissy: (낄낄대며) 그러게요.

나이도 이제 이십대 중반쯤 된 녀석이 별다른 소식이 없으니 나름 걱정되시는 모양이다. 사실 나도 연애하고 싶은 마음은 많다. 여자친구 사귀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면서 미래를 꿈꾸고 싶기야 하다. 하지만 확실히, 나이를 먹을 수록 연애하기 힘들어진다. 너무 보이는 게 많고 너무 걸리는 게 많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 좋아하지만 걸리는 게 많다는 뜻이라기보다도 애당초 사람이 쉽게 좋아지질 않는 거다. 워낙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탓도 있다.

인간불신에 걸렸다느니 하는 소리를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좋아했고 나름 헌신을 다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날 좋아해 줄 의무가 있지는 않다. 그건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마찬가지니까. 내 문제는 그런 게 아니다. '정말 좋아할 만큼 상대방에게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냥 만나서 적당히 놀고 웃고 즐기는 데에는 어떤 사람이건 별로 상관없다. 어느 정도 최소의 교집합만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사귄다고 말하려면 그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가치관이 좀 맞아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 어쩐다 해도 사실 가치관은 변하지 않는다. 하긴 그 이전에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부터가 힘들더라. 물론 가치관이 완전히 동일한 사람이야 있을 수 없지만, 아마 나는 그 '내게 있어서 최소한의 가치관 교집합'의 요구도가 좀 높은 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가치관이 더 확립되면서 소위 말하는 '완고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일까. 물론 나는 다른 사람의 어떠한 가치관도 무시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다들 나름의 일리는 있는 법이니까. 남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비웃고 무시하면 줘패고 싶게 화나는 것처럼 남도 내가 비웃으면 화날 거라는 걸 안다. 그러니까 무시하지 않는다. (물론 이건 남보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비웃고 무시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최소 근거가 된다. 나 역시 남 무시하면서 나 무시하지 말라는 건 정치인이나 할 소리 아닌가. 아, 정치인 무시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저건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나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나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선 안으로 들이려면 굉장히 민감해진다. 살아온 세월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환경이 달랐으니 가치관이 다르고, 그러면 사사건건이 부딪히게 되니까. 상대의 단점도 충분히 알고 그 때문에 아프기도 하지만 장점을 보고 키워 주며 사랑하는 게 정말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안 맞는 것 때문에 사랑하기가 힘들게 되더라.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내가 힘든 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뭐 그러면, 헤어지는 거지. 결혼이라도 했으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그냥 사귀는 정도에선 안 맞으면 헤어질 수도 있잖나.

그런 짓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또 똑같은 일이 생길까봐 움츠러들기도 하고, 살면 살 수록 더 완고해지기도 하고, -뭐 이래저래 나이 먹으면 먹을 수록 여친 사귀기는 힘들어진다. 마음에 안 든다고 바로바로 말하지 않고 묻어 두었다가 그냥 마음을 끊어 버리는 나 같은 인간형은 더더욱 그렇다. 말해서 고쳐질 거란 생각도 안 들 뿐더러 내가 맘에 안 든다고 고치라고 하기도 뭣해서 말하진 않지만 그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게 되는 식이다. 이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나란 인간 꽤 매정하구나.

아무튼 누굴 사귄다는 건 이래저래 피곤하다. 사귄다는 게 즐겁기만 하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려면 좋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십대 초반의 나는 그걸 몰랐지만 이십대 중반의 나는 그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신중하고 조심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하더라도 쉽게 고백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그건 채일까봐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귄 다음 그 사람이 싫어지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채이는 거야,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살다 보면 뭐 그럴 수도 있는 법 아닌가)

-뭐, 그 정도로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애당초 없는 것도 문제기는 하지만. (낄낄)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