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먼저 말해두면 훌륭한 글입니다. 이 책은 여덟 개의 단편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었는데 단편 하나하나가 최고의 질을 보장합니다. 단언하건대, 이걸 수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SF도 수작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글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정련을 거치게 되는가를 테드 창은 그 자신의 글로 보여 줍니다. 단편 하나하나에 심도가 있으며 읽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SF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꼭 한 번 쯤 읽어 보시기 바라며, SF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도 가능하시다면 한 번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칭찬은 이제 충분히 한 듯하니, 각각의 단편에 대한 감상을 슬슬 적어 보도록 하죠. 이건 이제 딱히 칭찬도 비판도 아닙니다. 단편이 던져 주는 화두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바빌론의 탑> : 바벨탑이 나옵니다. 이 세계관에서 세계는 현재 우리가 인지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며, 실제로 하늘에 '천장'이 존재합니다. 그 천장은 태양이나 별들 위에 존재하지요. 이것은 하늘 위의 저수지이고 그 저수지가 열리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는 식입니다. 속칭 궁창 위의 물인 셈이지요. 현대 건축법으로도 짓지 못할 까마득히 높은 탑을 이 소설에서는 건설하고 그 탑으로 실제로 하늘의 꼭대기에 닿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힐라룸이 발견한 그 세계의 구조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우주에 대한 어떠한 이론과 닮아 있습니다.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떠나 세계관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글입니다.
※ 궁창 (穹蒼, the firmament) - 창세기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태초에 지구는 완전히 물로 뒤덮여 있었고, 궁창 (빈 공간- 하늘이라고 생각해도 무방)이 생겨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고, 궁창 아래의 물- 즉 하늘 아래의 물이며 지구를 뒤덮고 있던 물은 궁창이 생긴 이후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한 곳으로 모이고 그것이 바다가 되고 뭍은 육지가 됩니다. 즉 태초의 지구는 바다와 육지, 하늘,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지구 전체를 덮는 수막이 있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지구는 온실과도 같은 상태였으며 딱히 북극과 남극이 과도하게 춥지는 않았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지방에서 따뜻한 곳에서만 살아가는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이유라고 봅니다) 이 수막, 궁창 위의 물은 노아의 홍수 당시 모두 쏟아져 내렸으며 그 물들은 지하로 유입되었거나 극지방에서 얼음화되어 갇혔다고 가정됩니다. 궁창 위의 물이 사라지자 그 전까지 태양빛을 가로막던 것이 사라져 지구의 환경은 크게 변화되었으며, 햇빛이 바로 내리쬐 반사되는 덕에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무지개가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무지개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가 되었습니다. 이상, 궁창과 궁창 위의 물, 그리고 무지개에 대한 Neissy의 설명이었습니다.
<이해> : 호르몬 주입에 의해 재생된 뉴런으로 초지능을 얻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지능을 얻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세계는 어떠한 모습일까요. 단순히 개량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의미를 다르게 파악할 수 있다면? 세계를 '이해'하고 말을 '이해'한다는 것.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영으로 나누면> : 이 단편은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왜냐하면 이 단편은 수학으로부터 기반한 세계관을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는 숫자놀이 (...)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기초산수 외에는 쓸 일이 없을 겁니다. 여하간 이 단편에서는 수학의 검증된 공리들만을 사용하여 1 = 2라는 결과를 증명해 내고 그 때문에 세계관 그 자체에 혼란을 겪는 여성이 나옵니다. 그 증명법대로라면 다른 어떠한 숫자도 서로 같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모순이 발생하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신학자'같은 느낌을 받고 맙니다. '마음속에서 깊게 무조건적으로 믿고 있었던 무엇인가가 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걸 증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에. 가장 논리적이어야 할 학문에서 논리적이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이죠. -라지만 이거 수학에 조예가 없어서 그런지 그다지 논리학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 부분은 딱히 와닿지는 않더군요. 논리는 결국 논리일 뿐이고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건 논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어서일까요.
<네 인생의 이야기> : 처음에 조금 헛갈렸던 단편입니다. 변분법의 원리- 서로 극과 극인 두 가지의 값을 내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는데, 이것도 수학이라 이 부분은 그다지 와닿지 않고,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는 조금 와닿더군요. 물에 닿은 광선은 꺾이게 되어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약 광선의 목적지가 처음부터 그곳이었다면? 물에 들어간 빛은 보통보다 느려지기 때문에 물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오래일 수록 느려지게 됩니다. 따라서 적절한 위치를 정하여 미리 공기 중에서 더 나아감으로서 물속에서 느려지는 시간을 보충해 들어간다- 는 논리인데, 이건 빛이 의지가 있고 처음부터 자기가 갈 곳을 정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인과론적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세계를 볼 때 가능하달까요. 그리고 보통 인간들은 인과적으로 봅니다만 이 단편에 나오는 외계인 헵타포드들은 결과적으로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결국 세계에 존재하는 물리 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어프로치지만 바라보는 것 자체는 같달까요. 개인적으로 이 단편에서는 신과 인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전 <죽음과 추는 억지춤 (제5도살장)> 감상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만 저는 시간이란 관념이 하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거든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있으며, 시간이란 관념은 그분의 피조물을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따라서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는 인과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분에게는 인과적인 동시에 결과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죠. 어느 쪽이건 간에, 솔직히 저는 인간에게 정말 결과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일흔두 글자> : 이름이 가진 힘, 언어가 가진 창조의 힘이라는 테마를 가집니다. 특별한 명명법으로 만들어내고 다듬어내는 이름으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주인공은 '자가증식'의 이름을 만들어내려 합니다. 물론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상상력은 꽤나 매력적이랄까요. 이름에 힘이 있다는 상상은 예나 지금이나 흥미롭습니다. 이쪽에 대해서도 공부해서 파고들어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인류 과학의 진화> : 아주 짧은 단편. 학술 보고서와도 같은 느낌입니다. 너무나 과학이 발달해 인류는 초인류를 만들어냈으나 그 초인류들의 기술과 지성을 인류들이 따라잡지 못해 오히려 뒤쳐지고 그들이 제공하는 기술을 분석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른 상황을 가정해 써낸 글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초인류가 있어 그만큼이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라 해도,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도 언제나 나라나 인간 간의 과학 기술의 불균형은 있습니다. 작가 자신의 창작노트의 말을 빌리면, '그 어떤 놀랄 만한 과학기술적 혁명이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지옥은 신의 부재> : 천사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강림하고 그 강림으로 인해 자연 재해를 받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세계, 그리고 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확실하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를 그려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고찰이라거나, 실제로 의인이었음에도 고통을 받았던 '욥'의 경우를 생각하며 써냈다고 하더군요. -라지만, 확실히 이 테드 창이란 작가가 실제로 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인 제 입장에서 보자면 여기에서 나온 담론은 좀 얕다는 인상이 들더군요. 단편 그 자체의 이야기를 넘어가 창작노트에 나온 욥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욥이 마지막에 보상을 받았다고 하여 '만약 이 이야기의 저자가 선은 언제나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정말로 공감하고 있었다면, 결말에 가서도 욥은 모든 것을 박탈당한 상태로 남아 있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합니다만, 이 경우 그보다 먼저 나온 문장인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예전 아이들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보상이 되는가 하는 의문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에서 좀 더 신경을 썼다면 그러한 의문으로 끝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끝까지 신을 버리지 않은 이가 정말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로 있어야 하는가 (물론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에 대한 담론을 잠깐 제쳐두고, 당연히 새로 태어난 아이들로서는 예전 아이들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완전한 보상이 되지 못합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새로 축복을 받은 것은 받은 것이죠. 어쨌거나 신을 믿고 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 세상에서 보상받고 죽을 때까지 남들 보기에 행복하게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천국이겠지요. 이 세상은 이미 타락한 세계이며 악한 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허용되는 세계입니다. (사실 이 단편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것은 이 부분이었지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천사'의 강림으로 인한 자연재해라니, 엄청나게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 : 얼굴 실인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지장이 없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해내지 못해고 그 차이를 판별하지 못하는 병이지요. 여기로부터 기초하여, 인위적인 '칼리그노시아 (callignosia)', 요컨대 사람의 얼굴 차이는 판별하나 그 미(美)적 차이는 구분하지 못하는 기술이 존재하는 시대가 이 단편의 배경입니다. 담론 자체는 간단합니다, 미의 추구와 미에 따른 편견 그리고 아름답지 못한 것에 대한 배척과 조소와 불평등을 그냥 두고 보아도 좋을 것인가, 아름다움을 아예 느끼지 못하게 하고서라도 그런 편견을 없애 버릴 것인가. '예쁘면 장땡이다'는 생각이 점차 당연한 것처럼 퍼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반드시 한 번쯤 읽어 봐야 할 단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글루에서도 얼마 전 있었던, '여자가 나이를 먹어서 화장을 안 하는 것이 왜 무례인가'라거나 '다들 화장을 하기 때문에 화장을 하지 않으면 혼자 (안 좋은 의미로) 튀게 된다)'라거나 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극단적인 미의 추구가 낳는 폐해를 다들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좋아합니다만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그 사람 자신의 진실성이 함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뭐랄까, 얼굴에 대한 아름다움의 인위적 추구가 어떠하느냐를 떠나서 현재 세상은 보고 듣고 먹고 즐기는 모든 것에서 이미 너무도 <인공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상 여덟 개 단편과 그 단편을 읽으며 든 생각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읽어 보시고 생각해 보시면 좋겠군요. 단편들에서 보여주는 그 세계 자체만으로도 확실히 매력적인 작품집입니다.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먼저 말해두면 훌륭한 글입니다. 이 책은 여덟 개의 단편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었는데 단편 하나하나가 최고의 질을 보장합니다. 단언하건대, 이걸 수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SF도 수작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글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정련을 거치게 되는가를 테드 창은 그 자신의 글로 보여 줍니다. 단편 하나하나에 심도가 있으며 읽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SF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꼭 한 번 쯤 읽어 보시기 바라며, SF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도 가능하시다면 한 번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칭찬은 이제 충분히 한 듯하니, 각각의 단편에 대한 감상을 슬슬 적어 보도록 하죠. 이건 이제 딱히 칭찬도 비판도 아닙니다. 단편이 던져 주는 화두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바빌론의 탑> : 바벨탑이 나옵니다. 이 세계관에서 세계는 현재 우리가 인지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며, 실제로 하늘에 '천장'이 존재합니다. 그 천장은 태양이나 별들 위에 존재하지요. 이것은 하늘 위의 저수지이고 그 저수지가 열리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는 식입니다. 속칭 궁창 위의 물인 셈이지요. 현대 건축법으로도 짓지 못할 까마득히 높은 탑을 이 소설에서는 건설하고 그 탑으로 실제로 하늘의 꼭대기에 닿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힐라룸이 발견한 그 세계의 구조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우주에 대한 어떠한 이론과 닮아 있습니다.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떠나 세계관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글입니다.
※ 궁창 (穹蒼, the firmament) - 창세기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태초에 지구는 완전히 물로 뒤덮여 있었고, 궁창 (빈 공간- 하늘이라고 생각해도 무방)이 생겨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고, 궁창 아래의 물- 즉 하늘 아래의 물이며 지구를 뒤덮고 있던 물은 궁창이 생긴 이후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한 곳으로 모이고 그것이 바다가 되고 뭍은 육지가 됩니다. 즉 태초의 지구는 바다와 육지, 하늘,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지구 전체를 덮는 수막이 있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지구는 온실과도 같은 상태였으며 딱히 북극과 남극이 과도하게 춥지는 않았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지방에서 따뜻한 곳에서만 살아가는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이유라고 봅니다) 이 수막, 궁창 위의 물은 노아의 홍수 당시 모두 쏟아져 내렸으며 그 물들은 지하로 유입되었거나 극지방에서 얼음화되어 갇혔다고 가정됩니다. 궁창 위의 물이 사라지자 그 전까지 태양빛을 가로막던 것이 사라져 지구의 환경은 크게 변화되었으며, 햇빛이 바로 내리쬐 반사되는 덕에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무지개가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무지개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가 되었습니다. 이상, 궁창과 궁창 위의 물, 그리고 무지개에 대한 Neissy의 설명이었습니다.
<이해> : 호르몬 주입에 의해 재생된 뉴런으로 초지능을 얻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지능을 얻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세계는 어떠한 모습일까요. 단순히 개량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의미를 다르게 파악할 수 있다면? 세계를 '이해'하고 말을 '이해'한다는 것.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영으로 나누면> : 이 단편은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왜냐하면 이 단편은 수학으로부터 기반한 세계관을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는 숫자놀이 (...)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기초산수 외에는 쓸 일이 없을 겁니다. 여하간 이 단편에서는 수학의 검증된 공리들만을 사용하여 1 = 2라는 결과를 증명해 내고 그 때문에 세계관 그 자체에 혼란을 겪는 여성이 나옵니다. 그 증명법대로라면 다른 어떠한 숫자도 서로 같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모순이 발생하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신학자'같은 느낌을 받고 맙니다. '마음속에서 깊게 무조건적으로 믿고 있었던 무엇인가가 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걸 증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에. 가장 논리적이어야 할 학문에서 논리적이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이죠. -라지만 이거 수학에 조예가 없어서 그런지 그다지 논리학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 부분은 딱히 와닿지는 않더군요. 논리는 결국 논리일 뿐이고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건 논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어서일까요.
<네 인생의 이야기> : 처음에 조금 헛갈렸던 단편입니다. 변분법의 원리- 서로 극과 극인 두 가지의 값을 내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는데, 이것도 수학이라 이 부분은 그다지 와닿지 않고,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는 조금 와닿더군요. 물에 닿은 광선은 꺾이게 되어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약 광선의 목적지가 처음부터 그곳이었다면? 물에 들어간 빛은 보통보다 느려지기 때문에 물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오래일 수록 느려지게 됩니다. 따라서 적절한 위치를 정하여 미리 공기 중에서 더 나아감으로서 물속에서 느려지는 시간을 보충해 들어간다- 는 논리인데, 이건 빛이 의지가 있고 처음부터 자기가 갈 곳을 정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인과론적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세계를 볼 때 가능하달까요. 그리고 보통 인간들은 인과적으로 봅니다만 이 단편에 나오는 외계인 헵타포드들은 결과적으로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결국 세계에 존재하는 물리 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어프로치지만 바라보는 것 자체는 같달까요. 개인적으로 이 단편에서는 신과 인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전 <죽음과 추는 억지춤 (제5도살장)> 감상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만 저는 시간이란 관념이 하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거든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있으며, 시간이란 관념은 그분의 피조물을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따라서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는 인과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분에게는 인과적인 동시에 결과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죠. 어느 쪽이건 간에, 솔직히 저는 인간에게 정말 결과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일흔두 글자> : 이름이 가진 힘, 언어가 가진 창조의 힘이라는 테마를 가집니다. 특별한 명명법으로 만들어내고 다듬어내는 이름으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주인공은 '자가증식'의 이름을 만들어내려 합니다. 물론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상상력은 꽤나 매력적이랄까요. 이름에 힘이 있다는 상상은 예나 지금이나 흥미롭습니다. 이쪽에 대해서도 공부해서 파고들어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인류 과학의 진화> : 아주 짧은 단편. 학술 보고서와도 같은 느낌입니다. 너무나 과학이 발달해 인류는 초인류를 만들어냈으나 그 초인류들의 기술과 지성을 인류들이 따라잡지 못해 오히려 뒤쳐지고 그들이 제공하는 기술을 분석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른 상황을 가정해 써낸 글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초인류가 있어 그만큼이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라 해도,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도 언제나 나라나 인간 간의 과학 기술의 불균형은 있습니다. 작가 자신의 창작노트의 말을 빌리면, '그 어떤 놀랄 만한 과학기술적 혁명이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지옥은 신의 부재> : 천사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강림하고 그 강림으로 인해 자연 재해를 받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세계, 그리고 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확실하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를 그려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고찰이라거나, 실제로 의인이었음에도 고통을 받았던 '욥'의 경우를 생각하며 써냈다고 하더군요. -라지만, 확실히 이 테드 창이란 작가가 실제로 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인 제 입장에서 보자면 여기에서 나온 담론은 좀 얕다는 인상이 들더군요. 단편 그 자체의 이야기를 넘어가 창작노트에 나온 욥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욥이 마지막에 보상을 받았다고 하여 '만약 이 이야기의 저자가 선은 언제나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정말로 공감하고 있었다면, 결말에 가서도 욥은 모든 것을 박탈당한 상태로 남아 있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합니다만, 이 경우 그보다 먼저 나온 문장인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예전 아이들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보상이 되는가 하는 의문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에서 좀 더 신경을 썼다면 그러한 의문으로 끝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끝까지 신을 버리지 않은 이가 정말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로 있어야 하는가 (물론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에 대한 담론을 잠깐 제쳐두고, 당연히 새로 태어난 아이들로서는 예전 아이들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완전한 보상이 되지 못합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새로 축복을 받은 것은 받은 것이죠. 어쨌거나 신을 믿고 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 세상에서 보상받고 죽을 때까지 남들 보기에 행복하게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천국이겠지요. 이 세상은 이미 타락한 세계이며 악한 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허용되는 세계입니다. (사실 이 단편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것은 이 부분이었지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천사'의 강림으로 인한 자연재해라니, 엄청나게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 : 얼굴 실인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지장이 없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해내지 못해고 그 차이를 판별하지 못하는 병이지요. 여기로부터 기초하여, 인위적인 '칼리그노시아 (callignosia)', 요컨대 사람의 얼굴 차이는 판별하나 그 미(美)적 차이는 구분하지 못하는 기술이 존재하는 시대가 이 단편의 배경입니다. 담론 자체는 간단합니다, 미의 추구와 미에 따른 편견 그리고 아름답지 못한 것에 대한 배척과 조소와 불평등을 그냥 두고 보아도 좋을 것인가, 아름다움을 아예 느끼지 못하게 하고서라도 그런 편견을 없애 버릴 것인가. '예쁘면 장땡이다'는 생각이 점차 당연한 것처럼 퍼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반드시 한 번쯤 읽어 봐야 할 단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글루에서도 얼마 전 있었던, '여자가 나이를 먹어서 화장을 안 하는 것이 왜 무례인가'라거나 '다들 화장을 하기 때문에 화장을 하지 않으면 혼자 (안 좋은 의미로) 튀게 된다)'라거나 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극단적인 미의 추구가 낳는 폐해를 다들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좋아합니다만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그 사람 자신의 진실성이 함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뭐랄까, 얼굴에 대한 아름다움의 인위적 추구가 어떠하느냐를 떠나서 현재 세상은 보고 듣고 먹고 즐기는 모든 것에서 이미 너무도 <인공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상 여덟 개 단편과 그 단편을 읽으며 든 생각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읽어 보시고 생각해 보시면 좋겠군요. 단편들에서 보여주는 그 세계 자체만으로도 확실히 매력적인 작품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