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오후였고 하늘은 약간 어두웠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얀은 바람 냄새를 맡으며 한가로이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읽고 있던 문장이 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서너 번을 반복해 새기고 있던 중이었다. 왼눈썹을 찌푸리고 책을 읽던 얀은 결국 책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물 먹은 먼지가 흐트러진 모양처럼 먹구름이 하늘에 깔려 있었는데 오늘 안에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빌런트 시는 비가 많이 오는 도시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적은 편이었지만 남동쪽에 쾰름 강을 접하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도시는 상업도시였으니 비를 반가워할 사람도 드물었다. 아무래도 비가 오면 사람들은 집에서 나서기 싫어하는 법이었으니까. 오늘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수는 많은 편이었다 . 거리를 다니는 저 많은 사람 중에 여기로 찾아올 사람이 있을까가 문제였지만. 얀은 가만히 어깨를 으쓱했다.

이곳, 그레이치 구 (區) 4번가 438번지가 얀의 집이자 사무소였다. 아담한 3층 건물의 3층을 세들고 있었고 내부를 두 구획으로 나누어 한쪽은 살림집으로 한쪽은 사무소로 꾸며두고 있었다. 사무소라고 대단할 것은 없어 조금 전 얀이 앉아 있었던 소파와 탁자, 책방 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는 문고판 소설이나 시 (市) 신문을 꽂아 둔 책장이 전부인 휑덩그레한 공간이었다. 오늘도 고객이 없었기에
얀은 느긋하게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얀은 프리랜서였다. 인구 3만이나 되는 이 거대한 상업도시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들. 의뢰가 들어오면 상응하는 돈을 받고 해결해 준다. 혹자에게서는 해결사라고도 불렸다. 의뢰가 없다는 일은 얀에게는 비극적이지만 도시에는 고무적이었다.

창문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펍 럼블버즈로 가 볼 계획이었다.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그 쪽으로 의뢰가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살림집 쪽으로 돌아가 코트를 챙겨입고 열쇠 꾸러미를 찾아 사무소로 돌아나왔다. 문을 잠그는 것은 살림집에만이었다. 얀이 없는 사이에 사무소로 찾아올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문을 잠글 필요가 사라질 것 같았다. 얀은 열쇠를 꽂으려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 저편으로부터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발소리였다.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단정한 진회색 외출복을 입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보통 기성복처럼 여겨져도 재질과 마무리가 훌륭한 고급품이었다. 외출복과 어울리는 진회색 실크 모자 아래로 탐스러운 금발이 웨이브져 흘러내렸고 또렷하고 맑은 푸른 눈동자는 영민해 보였다.

“얀 트로닉 씨인가요?”

카나리아처럼 가늘고 고운 목소리였다. 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로닉 사무소의 얀 트로닉입니다. 의뢰할 것이 있어서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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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뵈기니까 여기까지만. 여하간 플롯 설정이 되었으므로 이제 에피소드 1을 쓰고 있습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