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도서출판 숲

 <오뒷세이아>에 이어, 그리스 양대 서사시인 <일리아스>도 읽었습니다. <오뒷세이아>와 마찬가지로 천병희 역의 희랍어 원전 역본을 택했는데, 이걸 읽는 쪽이 좋다고 알려주신 '유진님ㅋㅋ' (댓글 닉에 원래부터 ㅋㅋ까지 붙어있어서······)님께 감사드립니다. 확실히 이 역본이, 희랍어 원전 역본인 것도 그렇지만 주석과 해설이 충실하게 달려있어서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더군요.

 사실 <일리아스> 자체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말할만한 내용은 없는데, 그래도 간단히 말해보자면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트로이아 함락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일리아스>의 시작에서는 이미 파리스가 황금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주고 헬레네를 데려온 이후로,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 군과 싸우게 되는 시점입니다. 아가멤논이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데려갔기 때문에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킬레우스와 함께가 아니면 그리스 군에게 승리의 영광을 주지 않으려 작정한 제우스 덕분에) 그리스 군이 계속 트로이아 군에게 깨지다가, 아킬레우스의 친우이자 시종인 파트로클로스가 전쟁 중에서 헥토르에게 죽임당하자 제대로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 화해하고 전쟁에 나서 결국 헥토르를 죽여, 파트로클로스의 혼백을 위로한 후 헥토르의 시신을 트로이아 군에게 돌려준다······는 내용까지가 <일리아스>입니다. 트로이아 전쟁이 다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무지한 탓이니 누굴 원망하랴. (게다가 생각해보면 먼저 읽었던 <오뒷세이아> 해설에도 <일리아스>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의 내용인지 설명되어 있었는데······ 아아)

 해설에 따르면 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일부로, 순서대로 <퀴프리아> - <일리아스> - <아이티오피스> - <소 일리아스> - <일리오스의 함락> - <귀향> - <오뒷세이아> - <텔레고노스 이야기> 이렇게 총 8권으로 이루어져있는 모양이고,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가장 방대하고 압도적인 분량을 지니고 있으며 이 두 편만이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다 합니다.

 읽기가 편하다면 편하고 어렵다면 어렵습니다. 내용 줄기 자체는 위에서 말한 게 거의 다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 진행 과정에서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의 관계도를 이해하려면 좀 많이 어려워집니다. 한두 명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많은 인물들이, 나와서 그 인물이 누군지를 설명하자마자 바로 전장의 이슬로 사라져갑니다. 죽고 죽고 또 죽고. 전쟁 서사시인데, 이걸 읽고 나니 <삼국지>는 오히려 인물이 적게 나온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ㅡ말하고 보니 거대한 전쟁이란 측면에선 <삼국지>와 좀 비슷한 면이 있군요. 비교한다면, 그렇군요, <삼국지>의 일부분, 즉, 관도대전 편이나 적벽대전 편 내지는 오장원 등과 비교하는 게 좋겠죠. (그러고보면 액션게임 <삼국무쌍> 시리즈로 유명한 KOEI에서 이번에 <트로이무쌍>을 낸다죠? ·····뭐랄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네요) 물론 <삼국지>와 비교하기에 <일리아스>는 신화적 측면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단순비교는 무리이겠습니다마는.

 책 뒤의 해설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만, <일리아스>에서 제게 인상깊었던 것은 '청동 무구를 쓰는 고대 영웅들의 위용'과 '고풍스런 언어', 그리고 '비유' (마치 제가 <일리아스>를 <삼국지>와 비교해서 전투를 설명했듯이, 꼭 그처럼 <일리아스>에는 수많은 비유가 나옵니다. ······'꼭 그처럼'이라는 문구를 아주 자주 보게 되실 걸요), '인간보다 도덕적으론 별로 나을 것 없는 신들'입니다. 여기에서 받은 인상들을 간단히 설명해보면 이렇습니다.

 청동 무구를 쓰는 고대 영웅들의 위용: 청동기의 영웅들은 우리 (<일리아스>가 쓰여졌을 당시의 그리스 인들이라 봐도 되는데)와 달리 강인하고 명성지향적입니다. 그들은 우리로서는 쉽게 들 수 없는 바위를 번쩍번쩍 들어올려 집어던져 상대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죽음에도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전장에 나가 싸웁니다. 정말 영웅서사시스럽죠.

 고풍스런 언어: 이걸 고풍스럽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상대와 만나면 냅다 싸우기 바쁠 텐데도 자기 소개와 족보 소개를 한 후 싸우는 일이 많습니다. 혹은 사실 쌍욕을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고풍스럽게 포장해놨어요. 이를테면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만나 분노에 차 말하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내가 아끼던 전우를 죽여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자가 저기 가까이 있구나.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는 싸움터의 한길을 따라 서로 피할 수 없으리라." 이렇게 말하고 그는 고귀한 헥토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가까이 와서 어서 죽음의 종말에 이르도록 하라. (p.560)" "너 잘 만났다, 이리 와서 내 손에 죽어봐라"······ 정도로 해석되는 말인데 실로 고풍스럽습니다.

 비유: 해설에서는, 영웅서사시인 만큼 이 시의 인물들은 청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때문에 <일리아스>에 나오는 무수한 비유들이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덜어주고 시야를 넓혀주고 옛 것에 생동감을 불어넣어줄 뿐 아니라 청중으로 하여금 상이한 사상들 간에 연관성을 찾아내게 함으로써 청중 또는 독자들로 하여금 사유하게 (p.761)' 만들어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비유가 많으면 그런 부분에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인간보다 도덕적으론 별로 나을 것 없는 신들: 이 그리스 신들은 거짓말을 잘 하고 속임수를 아주 잘 씁니다. 총애하는 인간은 보살펴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가차없죠. 어떤 사람과 친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거짓말을 하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을 죽게 만드는 데에 전혀 죄책감이 없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실제 있었던 일을 신화적으로 해석할 때 어떤 환청이나 환각, 착각이나 불합리한 우연의 산물 등을 신이 한 일로 만들어놓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더불어 해설에서는 이런 부도덕한 신의 모습을, 서사시는 애당초 귀족계급을 위한 문학이었으므로 신들이 귀족계급의 보편적인 도덕 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으며, 또한 귀족 계급이 자신들의 생활 태도를 의도적으로 이상화한 데서 비롯된 결과 (p.767)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리아스>의 기원인 트로이아 전쟁이 실제 존재했다는 사실은 19세기에 슐리만이 트로이아와 뮈케네의 옛 성터를 발굴해냄으로써 증명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일리아스>에 나온 일들이 얼마나 사실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첨가되고 각색된 부분이 워낙 많으므로 이걸로 역사를 논하기는 어렵다고 해야겠습니다. <삼국지연의>가 정사와 다른 것과 마찬가지랄까요. <일리아스>의 뛰어난 점은 그 사실성보다는, 그 당시 있던 이야기들을 하나의 줄기로 잘 정립해 서사시로 멋지게 만들어내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