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나는 한 소녀의 유괴 사건에 휘말렸다. 사라진 그 소녀는 어쩌면 내가 죽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이은 사와자키 시리즈 그 두번째, <내가 죽인 소녀>입니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 말했듯 이 시리즈는 챈들러에 대한 경애정신이 살아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필립 말로 시리즈를 일본식으로 로컬라이징한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모든 점에서 챈들러와 같지는 않으며,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만.

 이런 류의 작품에서 항상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부분은 역시 사회와 인물입니다. 하드보일드 추리극이란 대개 추리 그 자체는 생각만큼 중시되지 않습니다. 범죄가 일어난다면,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일어났느냐가 오히려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뜻이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반전에 사활을 거는 소설들과는 달리 '아, 일이 그렇게 벌어졌구나'하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작품의 매력은 반감되지 않고, 몇 번을 읽어도 오히려 더 깊이 있게 다가오는 것이야말로 하드보일드 추리극의 매력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하드보일드에 너무 호의적일지도 모릅니다. 여하간 가장 좋아하는 장르니까요)

 <내가 죽인 소녀>에서, 주인공 사와자키는 소녀 유괴 사건에 몸값을 지불할 사람으로 이용당합니다. 하지만 도중에 불량배들과의 격투로 인해 기절하고 깨어나고 나자 몸값을 강탈당한 상태였고, 유괴된 소녀는 결국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사와자키가 불량배들에게 당해 정신을 잃지 않았더라면 소녀는 죽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소녀의 죽음에 사와자키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사와자키가 범인을 찾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하드보일드가 으레 그러듯 그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정황을 파악하며 몸으로 부딪혀 사건의 정황을 파악해갑니다. 그리고 최후의 최후에, 모든 진상이 밝혀집니다.

 하드보일드 추리극의 매력에 대해 위에서 열심히 설명했는데, 이 <내가 죽인 소녀>에서의 사와자키에게서는 두뇌파의 모습이 좀 더 엿보입니다. 특히, 추리극의 패턴인 최후의 '진상 밝히기' 부분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실, 말로보다는 김전일에 더 가깝습니다. 책 뒤에서는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고전 미스터리의 퍼즐이 한데 엮'였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하기야 두뇌파의 모습이 좀 더 섞였다고 해도 사와자키는 기본적으로 행동하는 탐정 스타일이죠. 두 가지가 섞였지만 하드보일드 쪽 느낌이 아무래도 더 강하다고 느껴집니다. 다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와 비교하면 <내가 죽인 소녀>쪽의 하드보일드 소스가 좀 약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제가 <내가 죽인 소녀>의 하드보일드 소스가 좀 약하다는 인상을 받는 건, 하드보일드가 약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상 밝히기' 부분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진상 밝히기'에서 밝혀지는 진상이 뜻밖이라고 여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오히려 독자가 탐정보다 먼저 진상을 알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죠. 그건 '진상으로 가는 단서'가 굉장히 쉽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르의 트릭에 생소하면 모를까 조금만 이런 류의 소설을 읽어보았다면 단서를 캐치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챈들러의 <호수의 여인> 같은 경우는 책의 전반부, 시체가 떠오를 때에 이미 진상을 알아차리는 게 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인 소녀>에서는 '진상 밝히기'에서 밝혀지는 진상이 약간 뜻밖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뜻밖이라기보다는 '좀 갑자기 이 결론으로 넘어갔다'고 느껴지죠. 분명 단서가 제공되긴 합니다만 상당히 가볍게 언급되고 지나쳐갑니다. 많은 미스터리 소설에서 보던 '반전을 위한 반전'을 본 기분이에요. 마무리가 그렇게 되기 때문에 미스터리적 인상이 강해져서, 하드보일드적 인상은 상대적으로 약해집니다. 분명 두 개를 잘 섞어놓은 것만은 사실입니다만. 이게 하라 료식 하드보일드로 굳혀지는지 어떤지는 다음 작품을 읽어보아야 알 수 있겠군요.


 덧1. 내용 전개 자체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형사 영화를 볼 때처럼, 비교적 편안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덧2. 국내 출간 일정이 좀 빠듯했던 모양입니다. 오타가 보이더군요. ("가이 선생님ㅓ은 훌륭한 제자를 키우게 되셨죠." (p.144))

 덧3. 하라 료의 후기는 좀 재미있게 쓰여져있습니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도 그랬듯, 탐정 사와자키에게 누군가 찾아와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형식입니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는 인터뷰로써 필립 말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내가 죽인 소녀>에서는 어느 노신사가 작가인 하라 료에 대한 조사 의뢰를 하도록 부탁해서 사와자키가 하라 료의 경력을 읊는 형태가 되어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방식입니다. 저도 소설의 후기를 쓸 때 이런 식으로 써보고 싶을 만큼.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