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철리가의 여인
로스 맥도널드 지음, 이원경 옮김/시작

 새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저는 하드보일드를 매우 좋아합니다. 하드보일드 소설 읽을 때마다 하드보일드 좋아한단 소리를 써놓는 것도 참 징그러운 짓이다 싶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써놓을 만큼 좋아합니다. 그리고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있어서, 대실 해밋 - 레이먼드 챈들러 - 로스 맥도널드 이 세 사람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을 확립시킨 인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대실 해밋은 그나마 열린책들에서 <몰타의 매>를 깨끗하게 번역해주었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 여섯 권은 북하우스에서 멋지게 번역해준 데 반해,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 시리즈는 제대로 번역된 게 없었습니다. 동서문화사의 번역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전 로스 맥도널드의 추리소설은 동서문화사의 <소름><지하인간> 두 권을 읽었는데 두 권 다 번역이 기본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저질 번역이었습니다. 그 때 감상했던 내용을 좀 옮겨 보면 '대화 중 인물간의 어투나 존대말이 시시각각 바뀌며, 문단과 문장의 배열이 종종 헛갈리며, 어휘와 문장이 어귀가 잘 안 들어맞'습니다. 하드보일드란 세계를 '보여주는' 데에도 그 매력이 큰데 그걸 제대로 못 하면 매력이 반감되고 마는 것이죠.

 그래서 이번에 시작에서 나온 <위철리가의 여인>이 의미가 깊습니다.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와 세심한 묘사를 모두 다 제대로 살려냈거든요. 역자 후기에서 "기존에 나온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들은 그 명성을 고스란히 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의 소설은 사건 전개에만 급급한 통속적인 범죄 소설과는 전혀 다르다.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 있는 관찰과 통찰의 힘, 그것을 전하지 않는다면 이 소설의 가치를 반도 전하지 못하는 셈이다. 나는 기존의 번역본이 놓친 맥도널드 소설의 아름다움을 전하려고 온힘을 기울였다. 비록 그것이 어둡고 음울한 아름다움이라 해도. (p.418)"라고 말하고 있는데, 전 역자분이 이렇게 말한 게 잘 말해준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잘 살려냈거든요. 동서문화사 판과 비교하면······ 글쎄, 어렵게 설명할 것도 없이, 책의 한 페이지를 펼쳐서 읽어보고, 거기 묘사된 세계와 인물들을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이건, 살아 있습니다.

 하드보일드 소설을 감상할 때마다 몇 번이고 말하는데······ 하드보일드에서는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현대 사회에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룹니다. 로스 맥도널드의 탐정인 루 아처는 몸으로 부딪히고, 파헤쳐서, 밖에서 볼 때는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들 내부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밝혀냅니다. 그것은 추악하고, 음습하며, 고통스럽습니다. 망가진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망가졌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또 망가뜨리며 살아갑니다. 아처가 밝혀낸 진실로, 그는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요? 그는 결코 이 사회를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사회 속에서 망가져가는 사람 하나하나를 모두 구해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상처받고만 있었을 뿐인 사람 한둘 정도는 구해낼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네, 전 이런 거 환장하게 좋아합니다.

 동서문화사에서도 <위철리 여자>라는 이름으로 이 소설의 번역본이 나왔습니다만, 사실 전 그걸 읽지는 않았습니다. <소름><지하인간>을 읽은 정도로 이제 로스 맥도널드는 충분하다 여겼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서점을 별 기대 없이 돌아보다가 새로이 번역된 <위철리가의 여인>을 보고 보물을 찾아낸 기분이었습니다. 새로이 번역된 <소름><지하인간>을 다시 읽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하드보일드는 별 인기 없는 장르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더 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즐거운 일입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