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애론 에커하트 / 크리스토퍼 놀란

 이미 사방에서는 다크 나이트 열풍입니다. 히어로물의 특성상 예전부터 그 히어로를 좋아한 사람들의 평이 엇갈리는 경우도 있고, 너무 영화가 뜨니 반감이 생겨서 불평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저는 이 <배트맨 비긴즈> 이래의 시리즈를 좋아합니다. (이래의 시리즈라고 거창하게 말해봐야 사실 비긴즈 합쳐서 두 편입니다만) 제 지인들은 익히 알다시피 저는 너무 주위에서 설레발들을 치면 오히려 반감이 생기기 때문에 이번 <다크 나이트>도 그럴 뻔··· 했습니다만, 원래부터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런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퀼리브리엄> 이후로 크리스찬 베일을 원래 좋아하기도 했고요.

 본래 저는 배트맨이라는 히어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이냐면 궁상맞은 소시민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를 좋아하는 편이라, 돈빨로 밀어붙인다는 이미지가 강한 배트맨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더랬죠. 물론 팀 버튼의 배트맨이 그리고 사실 더 나아가 팀 버튼 감독 자체가 애당초 별 취향이 아니었다는 점도 있습니다만, 여하간 배트맨을 좋아하게 된 건 <배트맨 비긴즈> 이후의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독하게도 하드보일드하거든요, 이 시리즈의 배트맨은. 단순히 힘이나 돈빨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고뇌한다는 점이 와닿죠. 이런 게 있느냐 없느냐가 제가 어떤 히어로를 좋아하느냐의 기준이다 싶은데, 아무래도 이게 DVD까지 사고서도 사상 최강의 스토커 <슈퍼맨 리턴즈>를 그다지 즐겨 보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다크 나이트>는 히어로물이라는 장르 내에서 최대한 히어로가 가질 수 있는 고뇌를 이끌어내었다는 점을 평가할 만합니다. 제 지인인 ㅋ모 군은 "히어로물로서 이 이상 되는 영화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까지 극찬하고 있는데, 동의할 만 하다 봅니다. 어쨌거나 히어로물인 주제에 액션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아이맥스로 보면 좋으리라는 말이 여기저기 있기는 합니다만, 영상보다는 메시지가 중요한 영화라서 꼭 아이맥스로 봐야 할 영화까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이맥스로 볼 수 있다면 더 좋기야 하겠지만.

 '광대' 조커에 대해 말해보죠. 사실 비긴즈의 마지막에 조커 카드가 나오면서 다음 적은 조커다! 라고 예고했을 때는 스파이더맨에 베놈이 나올 것이다! 라는 것만큼이나 흥분하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뚜껑을 열어 보니, 어이쿠, 기대와는 상당히 다른 물건이로군요. 하지만 하드보일드한 배트맨의 상대역으로는 이런 정신 나간 조커가 더 어울리지 싶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원작의 조커로는 이 쪽이 더 가깝다고도 하고요. (한 마디로 원작이라고 말해도 이놈의 양키 코믹스는 워낙 바리에이션이 많기는 합니다만, 뭐 원작들을 다 찾아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니 그런 거겠죠) 여하간 히스 레저의 열연이 돋보이는데,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이 사실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인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의 죽음 때문에 비중이 더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런 식의 전개도 개인적으로는 사실 꽤 좋아합니다. 더불어 그의 죽음 때문에 영화가 실제보다 격상된 것이 아니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실제로 그가 멋지게 맛간 조커를 표현해낸 것은 사실이고, 대체 이후의 시리즈에서 누가 그를 대신해서 이런 조커를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제대로 미친 놈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니까요. 잘 만들어진 캐릭터이니 그냥 즐겨봅시다. 왜 그렇게 심각합니까?


영화 맛있게 잘 만들었잖아요. 이 포스터는 특정 회사 광고와는 별로 관계없습니다.
무려 공식 포스터이긴 하지만 (먼산)


 몇 가지 시각에서 영화가 펼쳐집니다. 혼돈의 대변자, 웃는 얼굴이 왠지 블랙 달리아 같은 조커. 마스크 미간도 주름이 잡혀 있는 우리의 매사 진지하고 고뇌하는 어둠의 흑기사 배트맨. 정의의 상징 하비 덴트. 이에 대해서는 이글루스의 여러분들이 워낙 썰을 많이 풀어서 딱히 이제 와서 또 풀 게 있겠냐 싶습니다만··· ···그래도 안 짚고 그냥 갈 수야 없겠죠.

 무엇보다 배트맨이라는 존재가 주는 상징성이 중요합니다. 그는 사적으로 정의를 지키려는 존재이지만, 그 개인적인 정의는 그 자신의 정의일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한없이 조커와 닮아 있습니다. 물론 조커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그저 광인이며 프리크 (freak, 별종 · 이질적인 존재 · 괴물)입니다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배트맨 역시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조커 말마따나 일종의 프리크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이것이 히어로라는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아이러니인데, 이미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내에서 시내의 모든 것을 도청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선'을 넘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한 인간이 어디까지 다른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일이 용인되는가? 배트맨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가 원하는 정의를 위해 사적인 폭력으로 타인을 억압한다는 점, 어둠에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이 이 부분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사실 영화상에서 배트맨은 하비 덴트라는, 밝은 곳에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는 검사의 존재를 보고 그가 있다면 배트맨이 사라져도 좋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불행히도 그가 원하는 대로 배트맨이 사라져도 좋은 세상은 오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하비 덴트 역시 배트맨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합니다. 범죄자들을 정석적인 방법으로만 잡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 역시 배트맨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그를 믿게 되죠. 따라서 배트맨과 하비 덴트는, 배트맨과 조커가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또다른 동전의 양면입니다. 결국 그들 모두가 두 얼굴을 가진 투페이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극후반에 가면 더욱 실제적으로 드러나서, ㅡ스포일러가 되므로 가립니다. 영화를 이미 보셨거나 미리 알아도 상관없다는 분만 마우스 드래그로 긁어보십시오ㅡ 하비 덴트는 결국 조커에게 먹히고 그 자신 스스로가 말 그대로의 투페이스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적인 심판을 자신이 생각하는 악인들에게 가하지요. 자제를 잃고, 완전하게 선을 넘어, 사적 감정만으로 움직이는 존재. 그것은 어쩌면 배트맨이 선을 넘었을 때 가게 될 하나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공적인 제재와 사적인 제재는 그 한계선이 어디까지이며, 정의라는 이름과 사적인 욕망의 경계선은 또 어디까지일까요. <다크 나이트>는 영화 전체를 통해 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배트맨과 조커는 극단에 서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극한으로 비슷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회 정의나 법,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지 않고 자기 가치관에 맞게 살아가기 때문이죠. 마침 둘 다 화장이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군요. 그들은 둘 다 시스템 바깥의 존재입니다. ㅡ다음 문장도 나름 스포일러므로 가려둡니다ㅡ 그러므로 배트맨이 조커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를 죽이는 순간 그와 동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생각이 있어서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커가 죽는다 해도 조커가 진 게 아니게 되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조커 역시 배트맨을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만. 단지 배트맨을 죽이면 자신을 상대할 만한 맞수가 사라지기 때문에 아쉽다는 이유에서입니다만. 결국 그들은 끝까지 일종의 투페이스인 셈이지요.

 그런 영화입니다. 조커의 광기는 배트맨의 반대편 극단, 동전의 양면 같은 형태로서 필요했고, 따라서 이 영화를 볼 때는 이 대립각을 유의해서 보면 재미있을 듯합니다. 물론 하비 덴트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대립각도 빼놓을 수 없지요. 확실히 이 정도의 히어로물 블록버스터를 또 만나보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히어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니까요. 그러니 극장에 걸려 있을 때 어서어서 보십시다.


 P.S. 레이첼이 예쁘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에 대해: 레이첼이 얼굴로 브루스 웨인과 하비 덴트의 사랑을 얻은 게 아니니 여기서 얼굴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 명은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강인한 의지에 반했을 테니까요. 그녀의 지적인 면과 굳센 의지가 충분히 어필되는데도 굳이 얼굴까지 미스 별나라스럽게 예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굴 예쁜 사람은 브루스 웨인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머리 나쁘고 가슴 큰 여자들만으로도 충분해요.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