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트 러쉬

프레디 하이모어,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케리 러셀 / 커스틴 쉐리던

※ 스포일러 포함합니다. 하지만 사실 별로 줄거리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에요.

사실 볼 만한 사람은 이미 다 본 영화이겠지 싶군요. 영화를 본 계기는 간단합니다.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에반게리온만은 죽어도 싫고 해서 (이유는, 그건 우려먹는 게 신물이 나서. 뭐 그 감독이 또 할 이야기가 생겼건 어쨌건 그게 굳이 에바여야 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얼마나 지겨운가 하면 "그걸 보느니 <원더풀 데이즈>를 극장에서 보겠어"라고 말했을 정도죠) 뭘 보기로 할까 하다가 전에 <어거스트 러쉬>가 "형 취향에 맞을 거"라며 지르엣이 추천한 게 기억 나서 어거스트 러쉬로 결정. 추천받으며 전해 듣기로는 기타 영화라고 들었는데 제가 음악 영화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말하라면 클래식 쪽 음악 영화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괜찮을까? 하고 약간 우려하며 보았습니다만 (이거 참 말이 길군요, 여하간) 결론부터 말하면, 이거 제대로 제 취향이었네요.

서사 구조를 말하자면 지극히 단순합니다. 주인공 에반 (어거스트 러쉬는 나중에 생기는 가명)은 고아원에 있는데, 실은 이 녀석이 부모님이 없는 건 아닙니다. 사연인즉슨 아버지는 밴드 메인보컬 (겸 기타리스트)이고 어머니는 첼리스트인데 이 둘이 만나서 하룻밤 쿵짝쿵짝하고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이 소년이 탄생했습니다만 어머니가 임신 중에 사고를 당했고 그녀의 첼리스트로서의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한 그녀의 아버지가 사고가 난 김에 아기를 없는 셈치고 아동복지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 소년의 존재조차 몰랐는데, 드디어 어느 날 이 소년이 무림출사하여 그 음악의 천재성을 드러내고, 영화의 끝자락에는 음악으로 연결되어 결국 감동의 상봉을 하게 된다ㅡ 뭐 이런 줄거리입니다, 간추려 보면. 딱히 줄거리는 별 것 없습니다. 게다가 뻔해요. 이게 나쁘냐고 하는 거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노골적으로 상징성을 드러내는 작위성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뻔해 버리면 오히려 멋지달까요? 게다가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줄거리보다는 음악에 더 무게가 실리기 때문에, 음악만 멋지다면 어쨌거나 좋다! 는 기분입니다. 줄거리 자체도 뭐 적당히 즐길 만 하지요. 단, 음악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 좋게 느껴지지는 않을 영화입니다.

이제 음악 자체에 대해 말해 보죠. 음악을 말로 설명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만,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부터 짚죠. 아버지는 밴드 메인보컬, 그리고 어머니는 첼리스트. 모처럼 음악 영화에서 이런 부분은 안 살릴 수가 없지요. 고로 살립니다. 밴드 풍의 음악이건 (어느 쪽이냐면 락이 아니고 감미로운 어쿠스틱 쪽이죠), 첼로를 기용한 클래식이건 말입니다. 그리고 이 둘의 만남에 있어서는, 서로의 연주가 교차하는 가운데 밴드 기타 음악에 첼로 음이 섞여 들어가는 느낌이 됩니다. 물론 따로따로 즐겨 줄 포인트도 있고요.

그리고 어거스트 러쉬. 질주하는 이 소년. 한 마디로 말해 천재 중의 천재. 빈 교향악단이 맨발로 도망가고 모짜르트조차 기겁할 만한 먼치킨입니다. 사물, 만물, 주위의 모든 것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는 이 소년은 너무도 대단해서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실 같이 본 모 양은 "편집의 승리"라고 말하는데, 우선 주위 사물의 음향으로부터 음악을 느끼는 부분이 굉장히 멋지게 표현되어 있어요. 장면 장면이 편집되고 음향이 섞여 들어가면서, 평범하게 들릴 노이즈가 리듬을 갖추고 음색을 갖추며 음악으로 나타납니다. 휙휙 바뀌면서 말이죠.

이 소년이 대단한 건 물론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천재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요. 간단히 말해서, 악기를 전혀 다룰 줄 몰랐던 주제에 악기를 잡자마자 멋지게 연주해 버립니다. 읊어 보죠. 기타를 잡자마자 핑거스타일 연주 (기타를 반쯤 타악기처럼 사용하는 방식. 이 영화를 위해서는 Kaki King이 녹음했다더군요. 그녀는 이 쪽에서는 꽤 유명한 듯 합니다. 물론 저도 검색해서 알아 본 겁니다)를 하질 않나, 악보 보는 법은 그렇다치고 음계의 개념조차 모르던 녀석이 그 기본을 알려주자마자 사물에서 음악을 느끼고는 악보를 수십 장 그려대질 않나, 대뜸 파이프 오르간을 웅장하게 쳐버리질 않나, 그래서 줄리어드 음대에 가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랩소디를 작곡하질 않나. 그 뿐이 아닙니다. 무려 지휘도 합니다! 이 녀석이 하나 하나 해 나갈 때마다 저는 그저 감탄의 연속. "이, 이봐 설마 그것도 할 생각은 아니지?" 먼치킨도 이만큼이나 뻔뻔해져 버리면 할 말이 없어져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오오 제기랄 최고야" 라고 할 뿐입니다.

지금 말씀 드린 부분에서 느끼시겠지만, 저 부문들의 음악이 모조리 나옵니다. 저뿐 아니라 합창곡도 나오죠. 테마는: 방황하던 소년, 교회에 가 위안을 얻다. 그 교회에서 악보 보는 법을 배우고 줄리어드도 가는 겁니다만, 뭐 줄거리 전개야 아무래도 좋으니까. 간단히 말해 이건 퓨전 음악 영화입니다. 잔잔하고 감미로운 풍의 음악 쪽이라면 얼추 섭렵해 들어가는,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가족 영화죠. 그래서 말인데, 저는 DVD 살 겁니다. (아, 전 이런 것에 너무 약해요, 흑흑)

물론 줄거리를 따지고 들어가면 취약한 부분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비판적으로 파고 들자면 사실 여러 가지 있죠. 다만 이런 류의, 일종의 장르 영화를 볼 때는 저는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무술 영화를 볼 때 무술만 좋으면 줄거리가 좀 약해도 상관치 않는 것처럼, 영화를 보면서 만족하고 싶었던 포인트만 잘 잡아 주면 만족인 거죠. 그리고 <어거스트 러쉬>는 충분히 음악을 즐기게 해 준다는 점에서 합격점입니다. 음악으로 시작해 음악으로 끝나는 영화, 이거 좋아요.


P.S. 어거스트 러쉬 역의 프레디 하이모어, 수줍게 웃는 모습이 꽤 귀엽긴 했는데, 영화 보는 내내 이상하게 어느 분과 겹쳐져서 쵸금 (많이는 아니고 쵸금) 애매했습니다. 어느 분이 누구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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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하이모어..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