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북하우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제가 환장해 마지않는 바로 그 챈들러입니다. 도서감상이 어느새 99개까지 채워져서, 100개째는 무얼 할까 하고 잠깐 (말 그대로 잠깐) 고민해봤는데 역시 챈들러가 가장 좋을 듯 싶더군요. 챈들러가 제게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데, 이렇게까지 취향에 딱 들어맞는 소설은 처음이었거든요. 어느 정도냐 하면 저는 일반적으로 어지간히 재미있는 소설을 읽어도 "오케이, 이렇게 쓰는 방식도 있구나"라고만 하고 그 작가의 소설을 굳이 다 찾아 읽지는 않는데, 챈들러에 한해서만은 국내 출간된 전작을 모았을 정돕니다. (라지만 뭐 전작이라고 해도 그리 많지는 않지요. 여섯 권 정도니까. 거기에 더해서 국내 미출간된 <Trouble is my business>도 원서로 구입하긴 했는데 이걸 제대로 읽으려면 40년대 미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 진전이 지독하게 더딤··· ···웨악) 그만큼 제 취향인지라, 이 도서 감상은 거의 칭찬 일색이 될 예정입니다. (물론입니다. 특히 이 <안녕 내 사랑>을 이미 예전에 한 번 짤막하게 감상했음에도 불구하고 100번째 도서감상글로 택했을 정도인데요)

 제가 챈들러를 알게 된 데에는 제 친구인 최호근™ 군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 친구에게 실로 감사하고 있어요. 이 친구가 <안녕 내 사랑>을 사고 제게 빌려줬는데 (그래서 이게 가장 처음 읽은 챈들러입니다) 어이쿠, 이게 제 취향에 딱 들어맞지 뭡니까.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 하지만 그 문체 너머에 숨겨진 화자의 감정. 썩어빠진 사회와 도시,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충격적일 만큼 세심한 묘사. 이게 추리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있습니다만 사건의 진상이 어떠하냐 하는 건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챈들러의 소설에서는 이 사회 속의 여러 삶을 보여주는 자체가 더 중시됩니다.

 흠, 하드보일드 (hard-bolied)라는 용어부터 먼저 설명해두어야겠군요. 이 용어는 마초이즘과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짙습니다만, '하드보일드'는 남자다움이나 폭력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건 일어나는 사건 등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되도록 담담하게 서술하는 기법입니다. 헤밍웨이가 선두주자죠. 더불어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이런 기법과 동시에 충격적인 (그리고 다소 폭력적인) 사건들이 펼쳐지기 때문에 그런 폭력성 등이 포함되어 '하드보일드하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하드보일드하다'는 말은 어떤 남자가 담배 한 대 피우고 위험에 굴하지 않고 위기 앞에서도 농담 한 마디 할 줄 알고 격투도 좀 할 줄 알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상에 빠지지 않고 사물을 바라보고 서술하는 모습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게 올바른 이해라 하겠습니다.

 하드보일드는 감상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화자의 감정을 그의 말이나 그의 행동에서 추측하게 되죠. 이런 부분을 유추해내는 게 또 하나의 재미이고,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딘가 세련미를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챈들러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묘미가 사실 바로 이 부분인데, 썩어빠진 사회를 헤쳐나가는 주인공- 필립 말로는 사실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지만 '내가 지금 힘들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죠. 냉정하고 시니컬한 척하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뜨거운 마음과 정의감, 잘못된 일들에 대한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직접적으로 '그렇다'고 쓰여있지는 않지만 조금 신경써서 문장들을 읽어나간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하드보일드의 매력은 시각적이라는 데 있겠군요. 감상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술은 화자의 내면 생각보다는 화자가 보고 듣는 것들을 표현하는 데 쓰입니다. 어떤 상황을 보거나 겪고 주인공이 자기 생각을 블라블라 늘어놓는 일은 상당히 드물고, 그저 상황을 보여주고 주인공이 하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결국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는 의미니 좀 동어반복이긴 합니다만······ 제가 정말 챈들러의 매력으로 꼽는 게 이 부분입니다. 바로 이 부분, 상황이나 사물, 인물을 묘사하는 감각이 뛰어나요. <안녕 내 사랑>에서 주인공 탐정인 필립 말로가 무스 맬로이를 묘사하는 부분을 한 번 살펴봅시다.


 ··· 그는 처음으로 자유의 여신상을 본 헝가리 이민자처럼 환희에 가득찬 표정으로 지저분한 창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덩치가 크긴 했지만 195센티는 넘지 않았고 맥주 배달 트럭보다는 덜 육중했다. 그는 내게서 3미터 정도 떨어진 채 팔을 옆으로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거대한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가는 담배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짝 마르고 조용한 흑인들이 거리를 오르내리며 그를 흘금흘금 곁눈질했다. 그는 정말 눈길을 끄는 모습이었다. 보풀이 마구 일어난 보살리노 모자를 쓴 그는 흰 골프공 모양의 단추가 달린 꺼칠한 천으로 된 회색 스포츠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갈색 셔츠에 노란색 넥타이를 맸으며,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는 넥타이와 똑같은 색깔의 선명한 노란 손수건을 층층이 꽂고 있었다. 주름 잡힌 회색 플란넬 바지 아래로는 발가락 부분이 하얗게 터진 악어가죽 신발을 신고 있었다. 모자 띠 한쪽에는 색깔 있는 깃털이 두 개 꽂혀 있었는데, 사실 이것까지는 필요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결코 수수하다고 할 수 없는 센트럴 로에서조차도 그는 하얀 카스텔라 조각 위에 올라앉은 타란툴라 거미처럼 눈에 띄었다.

 그의 피부는 창백했으며 면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마 항상 면도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와 두툼한 코 사이에는 짙은 눈썹이 거의 일자로 나 있었다. 그런 덩치를 한 사람치고는 귀는 꽤 작고 깔끔한 편이었으며, 눈은 회색 눈이 대개 그렇듯이 눈물을 머금은 듯 반짝거렸다. 그는 마치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더니 한참 후 천천히 미소를 떠올렸다. ···
<안녕 내 사랑>, pp.8-9


 무스 맬로이는 <안녕 내 사랑>의 중심인물입니다. 필립 말로는 그에게 끌려 들어가 플로리안이라는 주점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그가 벨마라는 여자를 찾다가 살인 사건을 만드는 바람에 일에 휘말리게 되죠. 스토리에 대해서는 딱히 크게 언급하고 싶지 않으니까 일단 넘어가고, 문장을 좀 더 봐 주셨으면 합니다. 세심한 문장과 센스 있는 비유가 돋보이는 멋진 소설이죠. 교묘한 트릭이나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에 대해서라면 챈들러를 능가할 만한 추리작가를 한 트럭 넘게 찾아올 수 있을 테지만, 이런 식의 문장 - 이런 세심한 문장을 지닌 작가는 그리 쉽게 찾아내기 어려울 겁니다. 제가 소위 3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작가 (대실 해밋 - 레이먼드 챈들러 - 로스 맥도널드) 중에서 챈들러를 가장 좋아하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작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챈들러가 바라보는 세계는 부패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계를 바꾸기에 개인은 너무나도 무력하죠. 그렇다면 포기해야 하는가? 필립 말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작중 캐릭터인 앤 리오단의 말을 빌어보자면 "모든 사람이 당신 머리를 때리고 목을 조르고 턱을 후려치고 아편으로 당신 몸을 가득 채우지만, 당신은 태클과 엔드 사이를 계속 씩씩하게 돌진해서 마침내 그들이 나가떨어지게 (p.421)" 하죠. 그가 비록 세계 전체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세계 중의 무언가를 바꿔놓을 수는 있고, 바로 그게 그가 영웅인 이유입니다. 무력한 개인이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하죠. 그에게는 부패한 사회와 맞서 싸우기에 충분한 고귀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세심한 문장이나, 부패한 사회에서 개인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취향에 맞으실 겁니다. <안녕 내 사랑>이라는 제목이 추리소설치고는 (다른 추리소설도 아니고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면서) 굉장히 감성적이라 생각되실 분들도 꽤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사실 꽤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랑이 등장하죠. 감상적으로 묘사하진 않지만, 읽어 보면 이들의 감정이 잘 느껴지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하드보일드란 그런 법이죠.


 덧. 북하우스판의, 박현주 씨의 번역은 상당히 질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챈들러 작품은 아니고,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도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것도 박현주 씨 번역이더군요.

 덧2. 북하우스판 필립 말로 시리즈에는 충실한 해석이 딸려 있기 때문에 그걸 읽어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합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