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슨 살인사건
S. S. 반 다인 지음, 김재윤 옮김/황금가지

 반 다인은 유명합니다. 반 다인의 본명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이고, 민족학과 인류학에 뛰어났으며 본디 문예 및 미술 비평을 하다가 필명인 반 다인으로 이 <벤슨 살인사건>이라는 추리소설을 처음 발표했죠. 여기에서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 소설은 꽤 문학적이며 고급스럽습니다. 본래 학술 쪽에 관계하던 사람인만큼 소설 내에 함유된 예술 · 과학 소스가 제법 훌륭해요.

 뭐 그건 그렇다치고, 사실 제가 반 다인을 알게 된 건 역시 레이먼드 챈들러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챈들러 빠돌이 아니랄까봐' 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 같군요) <안녕 내 사랑>에서 앤 리오단이 하는 말 중에 나오는데, 재미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 당신은 기다란 테이블의 제일 상석에 앉아서 이 모든 걸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매력적인 가벼운 미소를 띠고 파일로 밴스 (Philo Vance. S.S. 반다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현학적인 탐정-옮긴이)처럼 잘난 척하는 영국식 억양으로요."
-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 사랑>, pp.414-415

 약간은 빈정거리는 어조지만 이게 반 다인이 창조해낸 탐정인 필로 밴스 (황금가지판 <벤슨 살인사건>에서는 이름이 필로라고 번역되었으므로 그렇게 가겠습니다)를 간단히 설명해주는 말이라 봅니다. 그는 영국적으로 고급스러운 남자이고, 두뇌가 뛰어나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진상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주위 사람만 모르고 있다가 모든 일이 다 마무리지어질 때에야 알게 되죠. 셜록 홈즈형 탐정이랄까요. 필로 밴스는 셜록 홈즈, 존 마크햄은 와트슨, 화자인 반 다인은.. 그냥 화자 (소설 내에서 별로 반 다인이 하는 일은 없습니다).

 본격적이고, 좀 과학적이고, 현학적이며, 범죄 그 자체에만 눈길을 두지 않고 사람들에게도 눈길을 두는 꽤 괜찮은 추리소설입니다. 트릭은 글쎄, 그냥 괜찮다 싶은 정도였는데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니 별 문제는 없습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한번쯤 읽어볼 만합니다. 모든 걸 알고 있다가 조금씩 주위사람들에게 단서를 풀어주는 타입의 탐정을 선호한다면 아주 마음에 들 테고요. 그의 잘난체도 보다보면 재미있습니다.


 덧. 번역자는 자신도 필명을 사용해 다른 소설 번역한 적이 있다며 작가가 자기 이름을 숨기는 걸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어찌 어찌하여 의뢰를 받게 되었고, 부족한 생활비를 벌어볼 심산으로 뛰어든 일이었다. 그것도 나이 든 후에는 좀처럼 읽지 않던 추리 소설이었으며, 내용은 그야말로 남성 편향적인 것으로 힘과 폭력에 대한 찬미와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몇 달 동안의 뼈 빠지는 고생 끝에 내게 남은 것은 얼마 안 되는 번역료뿐이었고 별 보람도 없었으며 혹여 누가 볼까 두려워 내 이름을 겉표지에 올릴 수도 없었다. (p.389)' 고,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도 생활비를 위해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으음, 번역자가 말한 '힘과 폭력에 대한 찬미 ····'라는 소설은 아무래도 미키 스필레인의 <내가 심판한다>를 말하는 듯한데, 확실히 그 소설이 좀 마초스럽긴 합니다. 아마 이게 <내가 심판한다>의 번역자 이름이 박선주로 (약력은 같음에도) <벤슨 살인사건>의 김재윤과 다르며, <벤슨 살인사건>에는 역자 해설이 있는데 <내가 심판한다>에는 역자 해설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덧2. 사실 <내가 심판한다>나 <벤슨 살인사건>에서 번역 질에 딱히 불만은 없는데, 한 가지 아쉬움은 있습니다. 좀 더 남성적인 어투로 말해야 할 마이크 해머가 너무 부드럽게 말한다는 것이고, 필로 밴스도 말투가 좀 여성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해 보자." "~무엇무엇이야." 라는 말투를 주로 사용한다는 말입니다만, 저로서는 이 두 소설의 분위기상 "~해 보세." 라거나 "~무엇무엇이오." 라는 말투를 더 사용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