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크: 플래닛 헐크
Pagulayan, Carlo 외 지음/시공사

 하드보일드를 읽으면 종종 그런 캐릭터를 만납니다: 선천적으로 기골이 장대하게 태어난 장정, 옛날에 태어났으면 영웅이 되었을 수 있었을 터이나 현대 사회에서는 그저 사회에 휩쓸려 살아가는 하층민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헐크가 바로 그런 캐릭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헐크 자체는 배너 박사의 하이드 씨 같은 존재이며, 분노로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괴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이 <플래닛 헐크>의 이야기 초반에서 리드 리처즈, 아이언 맨, 닥터 스트레인지, 블랙 볼트 등의 히어로들이 헐크를 지구에서 감당할 수 없다며 먼 우주로 보내버리고 마는 것이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존재가 헐크입니다만, 과연 그에게 어울리는 세계가 있을까요? 가진 건 폭력뿐인 그가 영웅이 될 수 있는 세계는 어디일까요?

 말하자면 그곳이 바로 헐크가 보내진 다른 별, 사카아르입니다. 그곳에 떨어진 헐크는 노예로부터 시작하여 그를 가로막는 수많은 것들을 그 별에서 얻은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때려부수며 결국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라갑니다- 아내도 얻죠. 말하자면 <플래닛 헐크>의 구조 자체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고전적인 영웅담이죠. 하지만 그게 시원한 건, 지구에서는 여러 제약이 있어 환영받지 못하던 '헐크'의 모습이 이 별에서는 가장 환영받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초적인 쾌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별에서는 브루스 배너 박사가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헐크가 가진 약한 모습이죠. 보다 순전하고 노골적인 형태로 폭력이 지배하는 (아 뭐 말하자면 현대도 사실 폭력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이런 세계에서는, 헐크와 같은 남자야말로 추앙받을 수 있는 겁니다.

 <플래닛 헐크>는 <시빌 워>보다 먼저 출판됐습니다만 전 이걸 <시빌 워> 뒤에 읽었습니다. 사실 순서상으로 보면 이 쪽이 낫다 싶기도 합니다. <플래닛 헐크>는 <시빌 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시빌 워, 히어로들의 그 내전에서 헐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죠. 그 때 헐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답이 바로 <플래닛 헐크>에 있습니다. 그 때 그는 추방당했고 외계에서 그만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죠. 결국 <플래닛 헐크>에서 동료를 얻은 헐크가 다시 지구로 돌아온 후 자기를 추방했던 히어로들에게 복수하는데 그게 <월드 워 헐크>가 됩니다······마는 그거 아직 정발 안 됐죠. <플래닛 헐크>가 정발된 걸 봐선 아마 정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덧. 이렇게 저는 훌륭한 양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순조롭네요.

 덧2. <플래닛 헐크>의 말미에는 '검투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이 외계행성 사카아르의 생태와 문화 그 외 기타 설정들을 빼곡하게 써놓은 설명 페이지가 있습니다. <플래닛 헐크>의 스토리를 쓴 그렉 박은 이걸 "덕분에 사카아르는 마블 유니버스와 완벽하게 합치되는 깊이 있는 세계관과 역사를 얻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설명 페이지는 확실히 깊이 있긴 합니다. 저로서는 "내가 실제 역사 공부하기도 빡세 죽겠는데 있지도 않은 세계 역사까지 보고 있어야 하겠냐!"고 읽으면서 투덜거렸습니다만서도. 그래도 읽긴 다 읽었습니다. 나는 이제 정녕 양덕인가. 아아 이렇게 덕이 쌓여가는가.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