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열린책들
쉽게 가봅시다: <죄와 벌>은 무슨 책인가? 대학생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하여 전당포 여주인 노파인 알료나를 죽였으나, 사람을 죽인 무게를 버텨내기 힘들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했고 그러던 중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인임을 짐작한 예심 판사 뽀르피리 등이 그를 압박했으며 그 외에도 라스꼴리니꼬프를 압박해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결국 무너져내리고 자수하고 만다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해봅시다: <죄와 벌>이 읽기 어려운 소설인가? 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읽는 것 자체는 뜻밖에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주인공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를 엮어 나가면서 사건을 가지 뻗는 통에 분량이 근 팔백 페이지에 이르도록 늘어나지만,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높은 수준의 지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비록 책 가장 뒤에 줄거리 요약이 붙어있는 책이긴 하지만.
그럼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죄와 벌>을 감상 혹 비평하는 일은 어려운가? 답은 YES. 그것도 몹시 어려운 편에 속합니다. 단출하게 줄인다면야 확 줄여버릴 수 있지만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상징성 - 사건의 의미들 - 인물들의 대립을 통해 나타나는 사상들 - 기독교적 세계관 - 등을 설명하고 그에 대해 논하자면 이게 보통 복잡해지는 게 아닙니다. 괜히 이 책 뒤의 해설이 40페이지짜리 논문이 붙어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소설에 대해 논하는 건 말 그대로 논문이 된다는 소리예요. 죄와 벌이 뭐냐고요? 이 책을 읽은 게 죄고 감상을 쓴다는 게 벌입니다······ 누가 날 좀 살려줘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에 대해서만 말해봅시다. 그의 사상은 '평범'과 '비범'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평범인은 사회와 법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비범인은 사회나 그 룰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비범인은 사회의 개혁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룰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상당 부분 우연들이 개입된 결과이긴 하지만) 그가 전당포 여주인을 죽인 것은, 전당포 여주인이 진정 해치워야 할 악이어서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비범'함을 우선 가장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라 봐야 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후 그는 앓아 눕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이 생각하던 비범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으며 그 때문에 그는 괴로워합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죄'와 '벌'은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유효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살인이 죄이고 그로 인한 양심의 가책이 벌이겠지만, 설명했듯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범한 자라면 살인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므로 통상의 룰은 그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나폴레옹 같은 이가 사람들을 죽인 것이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 라스꼴리니꼬프를 괴롭힌 '벌'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었으며 고작 노파 한 명을 죽인 것조차 견뎌내지 못하는 자신의 평범한 신경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자수할 때도 그는 살인이 잘못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수하는 것이 앞으로의 자신의 삶에 유리한 것이라는 판단 때무에 자수합니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는 종국에 소냐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신앙을 느낍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서, 철저히 '자기 내부의 신념'에 의해 움직이던 라스꼴리니꼬프가 '타인의 신념' 그리고 더 나아가 신이라는 '절대'를 긍정하려는 듯한 태도를 갖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으로 새 사람이 되고 '소생'되어가리라고 말합니다만, 사실 <죄와 벌> 중 라스꼴리니꼬프의 그러한 변환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도 작습니다. 때문에 그가 진정 변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죄와 벌>에서 의미하는 죄는 무엇이고 벌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 소설에서 의미하는 죄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자기 내에서 찾는 것'이 죄입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행했는데, 그의 머리로 그것이 옳았다고 계속 변명해도 그의 또다른 정신 (이를테면, 영혼이라고 표현해봅시다)이 그것이 옳지 않음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소설 내내 그는 자신이 벌인 일로 인해 괴로워하고 압박을 받으며 편집증적 증세까지 보이죠. 영혼이 괴로워하는 그것이 바로 벌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만, 그것이 평안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자수할 때까지조차요. 단지 자신이 행한 일을 견뎌내지 못한 그 자체를 저주할 뿐입니다. 그러한 그가 '벌'로부터 벗어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도스또예프스끼는 이에 대해 소냐의 신념-신앙, 자신의 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을 행복의 길이라고 제시합니다. 인간은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죽어도 굴복하지 않지만, 거기에서 꺾여져 절대를 긍정할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도스또예프스끼가 마지막에 라스꼴리니꼬프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각오를 할 때에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 한 인간이 점차로 소생하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기독신앙에 의한 다시 태어남 (重生), 점차적으로 변화되어감 (聖化)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소설 역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왜 그걸 예로 드느냐면 제가 제대로 읽어본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소설이 그것뿐이니까) 인간의 회복은 신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신을 느끼는 방편으로 사랑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있어서는,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을 제시하죠.
지금 이 감상은 <죄와 벌>이 담고 있는 여러 내용들 중 기독신앙적인 부분을, 라스꼴리니꼬프에 한정해서만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철학적인 대립까지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다 하려면 말 그대로 논문이 되어버리고, 사실 기본 줄기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이런 감상에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네요. 여하간 참 기독신앙적인 소설입니다.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열린책들
쉽게 가봅시다: <죄와 벌>은 무슨 책인가? 대학생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하여 전당포 여주인 노파인 알료나를 죽였으나, 사람을 죽인 무게를 버텨내기 힘들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했고 그러던 중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인임을 짐작한 예심 판사 뽀르피리 등이 그를 압박했으며 그 외에도 라스꼴리니꼬프를 압박해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결국 무너져내리고 자수하고 만다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해봅시다: <죄와 벌>이 읽기 어려운 소설인가? 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읽는 것 자체는 뜻밖에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주인공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를 엮어 나가면서 사건을 가지 뻗는 통에 분량이 근 팔백 페이지에 이르도록 늘어나지만,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높은 수준의 지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비록 책 가장 뒤에 줄거리 요약이 붙어있는 책이긴 하지만.
그럼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죄와 벌>을 감상 혹 비평하는 일은 어려운가? 답은 YES. 그것도 몹시 어려운 편에 속합니다. 단출하게 줄인다면야 확 줄여버릴 수 있지만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상징성 - 사건의 의미들 - 인물들의 대립을 통해 나타나는 사상들 - 기독교적 세계관 - 등을 설명하고 그에 대해 논하자면 이게 보통 복잡해지는 게 아닙니다. 괜히 이 책 뒤의 해설이 40페이지짜리 논문이 붙어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소설에 대해 논하는 건 말 그대로 논문이 된다는 소리예요. 죄와 벌이 뭐냐고요? 이 책을 읽은 게 죄고 감상을 쓴다는 게 벌입니다······ 누가 날 좀 살려줘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에 대해서만 말해봅시다. 그의 사상은 '평범'과 '비범'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평범인은 사회와 법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비범인은 사회나 그 룰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비범인은 사회의 개혁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룰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상당 부분 우연들이 개입된 결과이긴 하지만) 그가 전당포 여주인을 죽인 것은, 전당포 여주인이 진정 해치워야 할 악이어서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비범'함을 우선 가장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라 봐야 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후 그는 앓아 눕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이 생각하던 비범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으며 그 때문에 그는 괴로워합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죄'와 '벌'은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유효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살인이 죄이고 그로 인한 양심의 가책이 벌이겠지만, 설명했듯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범한 자라면 살인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므로 통상의 룰은 그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나폴레옹 같은 이가 사람들을 죽인 것이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 라스꼴리니꼬프를 괴롭힌 '벌'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었으며 고작 노파 한 명을 죽인 것조차 견뎌내지 못하는 자신의 평범한 신경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자수할 때도 그는 살인이 잘못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수하는 것이 앞으로의 자신의 삶에 유리한 것이라는 판단 때무에 자수합니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는 종국에 소냐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신앙을 느낍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서, 철저히 '자기 내부의 신념'에 의해 움직이던 라스꼴리니꼬프가 '타인의 신념' 그리고 더 나아가 신이라는 '절대'를 긍정하려는 듯한 태도를 갖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으로 새 사람이 되고 '소생'되어가리라고 말합니다만, 사실 <죄와 벌> 중 라스꼴리니꼬프의 그러한 변환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도 작습니다. 때문에 그가 진정 변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죄와 벌>에서 의미하는 죄는 무엇이고 벌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 소설에서 의미하는 죄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자기 내에서 찾는 것'이 죄입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행했는데, 그의 머리로 그것이 옳았다고 계속 변명해도 그의 또다른 정신 (이를테면, 영혼이라고 표현해봅시다)이 그것이 옳지 않음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소설 내내 그는 자신이 벌인 일로 인해 괴로워하고 압박을 받으며 편집증적 증세까지 보이죠. 영혼이 괴로워하는 그것이 바로 벌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만, 그것이 평안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자수할 때까지조차요. 단지 자신이 행한 일을 견뎌내지 못한 그 자체를 저주할 뿐입니다. 그러한 그가 '벌'로부터 벗어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도스또예프스끼는 이에 대해 소냐의 신념-신앙, 자신의 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을 행복의 길이라고 제시합니다. 인간은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죽어도 굴복하지 않지만, 거기에서 꺾여져 절대를 긍정할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도스또예프스끼가 마지막에 라스꼴리니꼬프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각오를 할 때에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 한 인간이 점차로 소생하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기독신앙에 의한 다시 태어남 (重生), 점차적으로 변화되어감 (聖化)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소설 역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왜 그걸 예로 드느냐면 제가 제대로 읽어본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소설이 그것뿐이니까) 인간의 회복은 신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신을 느끼는 방편으로 사랑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있어서는,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을 제시하죠.
지금 이 감상은 <죄와 벌>이 담고 있는 여러 내용들 중 기독신앙적인 부분을, 라스꼴리니꼬프에 한정해서만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철학적인 대립까지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다 하려면 말 그대로 논문이 되어버리고, 사실 기본 줄기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이런 감상에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네요. 여하간 참 기독신앙적인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