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노래
시배스천 폭스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밑의 포스트에서도 적었지만 저는 책을 다분히 충동적으로 삽니다. 이 '새의 노래'도 예외가 아닌데, 서점에 갔으니 뭔가 하나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뒤적이다 페이퍼백 중에서 건져낸 물건이었죠. 600페이지를 상회하는 주제에 보급판 시리즈라 7,800원밖에 안 하는 가격에 끌린 것도 사실입니다만, 이걸 사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이게 1차 대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말하자면, 저는 전쟁 문학을 좋아합니다.

처음으로 접한 전쟁 문학은 안정효의 '하얀 전쟁'. (이건 나중에 두 편이 더 나와 삼부작이 되었습니다만 1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그런 류의 소설을 읽은 것이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인상깊었지요. 그 다음으로 인상깊었던 건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뭐 아실 분은 다 아실, '개선문'의 그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를 좋아합니다만)

그렇게 많이 읽어본 게 아니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쟁 문학에는 대체로 공통점이 있는데,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드는가'를 다룬다는 것이겠죠. 이 '새의 노래'에서는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어디까지 인간 품위를 다룰 수 있는가를 다룹니다.

이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차 대전 전과, 1차 대전 중과, 1979년경의 '현대'입니다.

도입부인 1부- 1910년의 프랑스에서 주인공인 스티븐 레이스퍼드는 유부녀인 이사벨을 만나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결국 그 사랑에 실패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성애 (性愛)의 묘사는 상당히 세세하며, 육체가 어떤 식으로 성적인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가를 세심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무대가 바뀌어, 1916년의 프랑스에서, 스티븐의 육체는 전혀 다른 상황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병사들의 육체는 총탄과 포탄으로 찢겨나가고 부서집니다. 너무도 많은 비인간적인 죽음을 보게 되고, 천천히 그는 '죽어갑니다'. 전쟁에 의해 완전히 피폐해져 버린 508페이지의 시점의 대화를 잠시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담배 피우게······." 그 (그레이 대령을 말합니다. Neissy 주)가 말을 이었다. "그래, 요즘은 조그만 지도하고 목록들을 가지고 놀면서 즐기고 있나?"

스티븐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는······ 그저 생존할 뿐입니다."

"생존해? 이런 세상에. 그 말은 자네처럼 최전선에서 싸우는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전출을 요청하지 않았으니까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내가 보기에, 자네는 전투에 지쳐 있어. 내 말 잘 들어 둬,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로 그 지경까지 가지 않아. 총알이 알아서 처리하거든."

"예. 저는 운이 좋았지요." 담배 연기가 폐로 들어가자 스티븐이 콜록거렸다.


전쟁을 겪으며 병사들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쇠약해집니다. 그들은 '후방'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전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끔찍하며, '후방'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새의 노래'에서 보이는 한 가지 특이점은 이 소설이 땅굴과 굴착 인부들을 상당히 크게 조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메인 테마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땅굴을 파 들어가면서 적들의 소리에 집중하고, 언제 수백 수천 톤의 흙이 쏟아져내릴 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적들 또한 땅굴을 뚫고 그 땅굴로 폭약을 폭파시켜 이편의 땅굴을 부수고 인부들 (그리고 또는 병사들)을 매장시켜버리기도 합니다. 총탄과 포탄이 날아드는 지상 위에서의 전쟁만이 1차 대전의 전부가 아니었으며 이쪽 또한 1차 대전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얼마나 허무하게 죽어갔는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전쟁 전과 전쟁 중이 아닌, 1979년경의 현대에서 1차 대전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1차 대전을 겪었던 이들은 거의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입니다. 겪은 이들은 그들의 '체험'을 말하지 않으며 겪지 않은 이들은 그것을 '체험'으로 알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이고 지나간 일입니다. 와닿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스티븐의 외손녀 엘리자베스는 스티븐의 행적을 쫓습니다.

한국인인 저에게 있어 1차 대전은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건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저의 할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신 분이고, 상이용사인 할아버지에게 한국전쟁은 '체험'이겠지요. 그분이 어떤 일을 겪었을지 저는 모릅니다. 아마도 물으려 하지 않을 테고, 할아버지도 굳이 말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죽어갔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었거나 정신적으로 죽었고, 살았다 하더라도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을 만한 커다란 상처를 입었습니다. 비정상적인 세상과 정상적인 세상이 공존한 그 시대. 이 소설은 그 시대에 대한 기록입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