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권 수련을 시작한 지도 어느새 만 15년이 되었다. 해마다 기념글을 써 오는데, 오랜만에 예전의 기념글을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그땐 한참 모자랐지'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지금을 돌이켜봐도 마찬가지일 테고, 어쨌거나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게 올바른 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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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 자체에 대해서는 사실, 요즘 들어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개인적인 기념으로서 의미가 없진 않지만, 시간이 반드시 실력을 담보해주진 않는 법인지라 연차 자체는 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혹은 역으로, 들인 시간만큼의 실력은 나와야 한다거나 하는 부담 같은 걸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닌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 나가고 있느냐 하는 게 중요하지, 연차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신경 쓸 필요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굳이 기념글 같은 걸 남기고 있느냐 하면... 이런 걸 핑계로라도 가끔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서랄까.
영춘권을 배우기 시작할 초기에는 영춘권을 10년 배우면, 20년 배우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했던 듯한 기억이 있다. 20년까지는 아직 가지 않았지만 일단 15년을 한 지금 돌이켜보면, 의외로 그냥 덤덤하다. 해온 것들을 좀 더 잘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하나씩 해 나가고 고쳐 가는 나날, 그게 다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이기에 그냥 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하려고 하는 게 잘 되면 즐겁고,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 계속 고쳐가야 하는 걸 알기에 거기서 만족할 수는 없고, 좀 안 되도 고치면 되는 걸 아니까 괴롭지만은 않고, 하지만 항상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가야 하기에 편하지도 않고. 힘들지만 즐겁다고 하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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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쓰는 방식이 계속 바뀌어 간다. 조금씩 더 깔끔해지고 조금씩 더 몸 전체를 효율적으로 쓰도록 변한다. 이 말 자체는 꽤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그 무게감은 다르다. 이를테면 최근 들어서는 내 동작이 변화하더라도 그게 무엇이 바뀌었는지 문외한은 알아보지 못한다. 이전에 비해 외견상 변화가 적다. 하지만 나 자신이 느끼는 체감으로는 엄청난 변화다. 점점 더 그런 방식으로 변화해 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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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연습했고, 오늘도 연습하고, 내일도 연습하겠지. 그게 즐겁다.
체중이동도 잘한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움직이지 않고 서서 상대와 싸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제자리에서의 연환충권 연습은 중요하다. 영춘권다운 몸을 단련할 수 있는 동시에, 충권 자체의 수준도 확실하게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보법 연습이 필요한가? 필요하다. 보법과 함께 기술을 쓰는 걸 연습할 필요가 있는가? 당연하다. 상대방과 붙고 상대를 제어하고 틈을 만드는 연습이 필요한가? 물론이다.
결국 다 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한다. 충권에 대해 말했지만, 결국 영춘권 자체의 수준이 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꾸준히, 성실하게, 충분한 횟수로, 정확한 자세로, 올바른 감각으로.
개인적으로 충권이 한 단계 늘었다. 더 빠르고 깔끔해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되었느냐고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름대로 목표가 있고, 그 목표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아마 그 목표를 이룬다고 해도 새로운 목표가 생길 것 같긴 하지만.
연습할 때는 잘된다고 생각하던 것이 긴장된 상황에서는 잘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건 원래 실력이 있었는데 긴장돼서 실력이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본래 문제가 있었는데 어물쩍 넘어갔던 부분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본다. 긴장되거나 긴장되지 않거나, 정신이 있거나 없거나, 화가 났거나 침울하거나 등에 상관없이 몸에 이미 배어 있어서 그렇게 움직여 버리고 마는 것만이 진짜다.
실은 평소에도 집중했어야 했을 부분을 괜찮다고 생각해서 넘겨버린 것들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 되어 있는지 시험받는 상황에서는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긴장된 상황에서 무언가가 잘되지 않는다면, 그건 '원래 나는 할 수 있는데'가 아니라 '아직 이런 것들이 모자랐구나' 하고 다시 잡아야 한다. 몸은 정직하다. 정말로 계속해서 배어 있는 것이 아니면 쓸 수 없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나 긴장이 어느 정도 몸을 굳게 만드는 건 사실이고, 그게 주는 영향이 또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국, 무술이란 그런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익숙한 것을 쓰기 위해 평소에 연습하는 것이다. 내가 긴장하든 긴장하지 않든 몸이 그냥 그렇게 움직여 버리는 수준을 노리지 않으면, 무술을 위급한 상황에서 쓰기 위해 연습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하던 것을 문득 정리했다. 아무리 봐도 연습이 모자라다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나는 나지. 내가 목표로 하는 길은 끝이 없고 여전히 멀다.
저번에는 50cm, 이번에는 25cm 눈이 내렸다. 내렸다 하면 폭설인 이번 겨울이라 눈을 원없이 치우고 있는데, 눈을 치우고 있다 보니 눈삽을 미는 자세가 영춘권 자세로부터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사실 딱히 의식한 건 아니었는데 이젠 그 자세가 힘 내기 편하더라.
중심을 낮추고, 팔을 몸 앞에 두고 공간을 만들며 힘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면서 몸 전체로 힘을 쓰는 자세. 치워야 할 눈 양이 워낙 많다 보니 이렇게 하더라도 뻐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몸 특정 부분이 피로해지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피곤해지는 것이니 힘을 쓰는 상태로서는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상에서의 활용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서의 실전이다... ...같은 말을 할 생각은 아니지만, 어떤 영역에서건 영춘권이 몸에 배인 실감이 나면 꽤 즐겁다. 의식하지 않고 움직여도 몸이 영춘권적으로 움직이면 그게 최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