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손안의책(사철나무)

전작인 <우부메의 여름>으로부터 이어져, 교고쿠 나츠히코는 이번에도 몽환적이고 정신 나간 세계를 특유의 궤변으로 화려하게 펼쳐 보입니다. 중심 화자가 되는 세키쿠미 다츠미는 기본적으로 울증 환자 경향이 있는데다 휘둘리기 잘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 남자의 시각을 통해 교고쿠 나츠히코가 뿜어내는 모호함에 빨려들면 이 소설이 보여 주는 관념파괴에 헤매게 될 지도 모릅니다. 관념의 재구성에 더불어 도덕 같은 것은 간단하게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내는 이런저런 사건들은 말 그대로 엽기적이라고 할 만 합니다.

읽어 볼 사람의 재미를 위해서라도 스토리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기 힘듭니다만,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경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또한 비단 인간 외에라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이런저런 일들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제목으로까지 쓰이는 이 <망량>이란 요괴 자체도 그 경계가 애매한, 정체가 흐릿한 요괴입니다. 만약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확실하게 보지 못한다면 세계를 보는 눈에 있어서 이 소설에 꽤 영향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공포영화의 화법입니다. 일어나는 사건 자체와는 별도로, 혼란스러워하는 캐릭터들의 모습이나 연출, 분위기를 사용해 사건을 냉정하게 보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불가능이라는 말은 사건의 본질을 보는 게 어렵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계의 본질을 보는 게 어려워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분위기를 즐기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와 엽기적인 사건, 냉철과감한 교고쿠도-추젠지 아키히코-의 입을 빌려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어디까지가 인간인가>를 설파합니다. 이렇게까지 효과적으로 궤변을 늘어놓는 소설도 흔치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은 역시 판타지 소설로 분류하는 쪽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에서 구성시킨 <세계>는 이미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고 새로이 정립시킨 또 다른 세계입니다. 확실히 이 세계관은 재미있고 흥미로우며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저에게는 거북함이 있습니다. 이 썰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에 저는 이미 <세계관>이 확립되어 있거든요. 이봐,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건 아냐, 라는 느낌?

단, PaleSara군이 이 소설에 대해 우려 섞인 목소리 -포스트: 망량의 상자- 를 내었던 것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인간을 그저 육체로만 이해하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에 반론을 내기 힘들 겁니다. -사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개인적으로 저는 종교라든가 하는 신념이 존재하지 않고 진화론이나 유물론 등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도덕>을 중시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들키지 않으며 그래도 괜찮은 상황이라면 살인할 수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사실 동성애나 근친혼에 대해서도 같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이 그저 물질로만 존재한다면 대체 그게 뭐가 문제가 될까요. 도덕이나 신념 같은 것은 그저 관념에 불과하며 단지 현재 이루어진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병에 걸릴 수 있다거나 기형아 확률이 높다는 것도 그저 당사자가 감당할 문제입니다. 자신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규탄할 대상은 아니지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규탄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분노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인답지 않게 행동하고 그게 기독교인으로서 문제없다>고 말하는 경우 뿐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그렇게 하고 싶다면 어떤 신념이나 이상을 자신에게 맞게 변화시킬 게 아니라 신념이나 이상을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어요. 뭐라고 하는 게 무책임한 거지.

그러므로 이러한 말이 성립 가능합니다: PaleSara가 인용했던 대로, "그야 그렇겠지. 행복해지는 것은 간단한 일이거든." 교고쿠도가 먼 곳을 보았다. "사람을 그만둬 버리면 되네." (下권 p501) 라는 말이 나올 수 있죠. 단지 <사람이 대체 무엇인가>에 따른 논의가 필요할 테지만. 정말이지 너무 그럴싸하게 말하기 때문에 휘말려들기 쉽지만, 결국 이 소설도 한 사람의 의견에 불과하니까요.

다 만 불행히도 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고,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발현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저러한 모든 논리는 제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보이는 세계만 믿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논하지는 않습니다만.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