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썼던 퓨전판타지 소설을, 기본적인 테마와 관점도 사건도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도, 캐릭터와 그 성격도 모두 바꾸어, 말 그대로 '리메이크'중입니다.

아마 영시 완결 후에 연재개시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래는 언제나 그렇듯이 맛보기~ (가장 처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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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형식이 사라졌다.

  그것은 일 주일 전의 일이었다. 햇볕이 따뜻한 어느 여름날이었고, 전날의 게임 탓에 늦잠을 자서 장장 6교시에 등장한 덕분에 운동장 스무 바퀴를 돌았던 날이었으므로 잘 기억하고 있다. 메마른 흙냄새를 만끽하며 훈훈한 공기 속에서 수영하고 온 다음 수도꼭지에서 공급받은 시원한 물을 머리로부터 사방으로 흩뿌리며 4층 교실로 돌아온 나는 활기차게 고3 제군들에게 외쳤다.

  “여어, 다들 오랜만이다!”
  “점심이 지나서 오니 오랜만이기도 할 거다.”

  그렇게 답한 곱슬머리 뚱뚱보 녀석은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정현우였다. 언제나 입에 빵을 달고 있는 만큼 덩치도 내 두 배는 되는, 신체의 칠 할은 틀림없이 전분으로 되어 있으리라고 추측되는 녀석이다. 찌는 녀석은 계속 찔 뿐이지 절대로 빠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곳에서도 관성의 법칙이 어김없이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오늘도 변함없이 패스츄리를 입에 물고 우적거리며 녀석이 자기 옆자리, 요컨대 내 자리인 책상 위에 놓여진 프린트를 가리켰다.

  “니 거다.”
  “음.”

  자리에 앉으며 프린트를 집어들고 확인했다. 국어와 영어 프린트다. 문제지를 복사한 것인 모양이고, 영어 쪽에는 듣기 평가 문제도 두어 개 있다. “다음 시간까지 풀어 오랍신다.” 그렇게 말하는 현우의 말을 콧등으로 흘려넘기며, 일단 책상 수납장에서 대충 153 볼펜을 꺼내서 듣기 평가 문제 그림의 여자분에게 예쁘게 구레나룻을 그려 준다. 잠시 후에 여자분은 멋진 바다 사나이가 되어 있었고 나는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수염을 보면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을 알 수 있는 법이라지.”
  “……문제에는 여전히 관심이 없구만.”
  “핫핫.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그 어떻게든에 내가 관계될 거 같은 건 착각인가.”
  “에이, 다 아는 사이에 뭘 또.”

  “호오.”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밀을 교환하는 사람들끼리만 알 수 있는 애매모호한 웃음과 함께 그가 묻는다. “거래조건은?”

  “패스츄리 한 개.”
  “좋군.”
  “낙찰.”

  이것으로 이번 숙제도 해결. 히죽 웃으며 프린트를 대충 수납대 속에 구겨 넣으려니 교실 앞문이 열렸다. 어느새 쉬는 시간이 지나가고 7교시가 된 모양이었다. 원래는 보충 학습 시간이지만 왠일인지 담임이 들어온다. 교탁에 서서 교실을 둘러보더니 나를 바라보고 묻는다.

  “세혁이, 너 또 늦을 거냐.”
  “선생님, 보증은 친구도 안 서는 거랍니다.”
  “……너한테 물은 내가 잘못이다.”

  한숨을 내쉰 담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다시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형식이는 아직도 안 왔나?” 그 질문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1초 뒤였고, 교실 앞쪽에 비어 있는 자리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2초 뒤였으며, 그 자리가 반장이자 전교 1등님이신 양형식의 자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3초 뒤였다. 그래서 그 3초 뒤에 나는 죽어 있었고 나 대신 양형식의 옆자리에 앉은 박수민이 당당하게 답했다.

  “안 왔습니다.”
  “그런가.”

  담임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 틈을 타 나는 현우에게 물었다. “형식이 안 왔냐? 이 녀석 7교시까지 지각이라니 학생의 자각이 없구만?” 현우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 3회 꼬박꼬박 지각하는 네가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
  “내 맘 알믄서.”
  “……좀 닥치고, 여하간 형식이 이상하게 늦는다. 집에서는 학교 갔다고 그랬다는 모양인데.”
  “오호.”

  나는 감탄하며 교탁 쪽의 담임을 돌아보았다. 담임은 창밖을 바라보며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50대에 배 나온 중년 아저씨라도 그러고 있으니 그림이― 될 리는 없지만 아무튼 이거 참 문제이긴 문제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문제이긴 문제였다. 이제 시점을 되돌려서, 일 주일 전이 아니라 그 때로부터 일 주일 후인 오늘인데, 오늘도 형식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자습해라.”

  그렇게 말하고 교실을 나간 담임의 얼굴은 삼백 년을 굶은 크로마뇽인만큼이나 초췌해져 있었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도 바뀌는구나  하고 멋대로 감탄하는 사이 옆자리의 현우가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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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시와 비교하면 좀 더 쉽게 읽히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그런 글을 목표하는 중입니다. 뭐 일단 써봐야죠.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