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 2: 최후의 결전
양조위, 금성무 / 오우삼
글렀습니다. 이 영화는 글렀습니다. 전편인 <적벽대전 1>을 보았을 때 저는 "오 멋진데? 좀 주유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편성하긴 했지만 적벽대전은 사실 오나라가 중심이니까 괜찮은 해석이지. 사실 난 오나라 좋아하기도 하고."라고 생각하고 2를 기대했습니다만, 이번에 개봉해서 정작 보고 나니 처참하더군요. 영상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어느 쪽이냐면 상당히 잘 만들었습니다. 연출력도 좋아요. 하지만 영화는 영상만 보고 마는 물건이 아니지요. 영상을 받쳐주는 스토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니 저게 무슨 개짓거리야?"라는 말이 수십 번이나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습니다. 영화 진짜 못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의도에 따라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를 재편성하는 중에 캐릭터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으며 리얼리티도 현저하게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죠.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삼국지연의를 가지고 만든 영화를 두고 스포일러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정말 말 그대로 스포일러가 됩니다)
이 영화는 주유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적벽대전입니다. 그 점에 저는 이견이 없으며, 사실 주유를 멋지게 그려낼 수 있다면 그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애당초 전 삼국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손견이고 그가 세운 오나라도 꽤 좋아해요. 오나라가 중심이 된다고 해서 불만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문제가 있는데, 그건 지나치게 영화의 포커스를 주유 대인배화에 맞추고, 오나라가 주역이 되도록 만드느라 삼국지의 구조 자체를 바꿔버렸기 때문입니다. 바꿨으면 세련되게 바꾸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 바꾼 방식도 저질입니다. 욕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전 이 영화 보면서 좀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열심히 빈정거릴 터라, 이 영화가 마음에 드신 분들은 이 감상을 안 읽으시는 쪽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손상향 (손권의 여동생)과 소교 (주유의 부인)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원래 그녀들은 삼국지연의 원작에서는 거의 비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비중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에서처럼 활약하진 않죠.
우선 손상향: 본래 그녀는 감부인을 잃은 유비에게 (거짓으로) 새 장가를 들도록 해서 오나라로 데리고 와 죽이려는 간계로서 이용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이어야 할) 혼인을 손권의 어머니인 오국태 부인이 알게 되어, 딸을 궤계에 사용한다는 데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그녀가 유비를 실제로 보고 마음에 들어해버린 탓에 진짜 혼인이 되어버리는 에피소드가 있죠. (그 후에도 이야기가 좀 더 있지만 여하간 그런 정도) 여하간 본래 손상향은 그러한 인물이며, 실제로 무 (武)를 좋아하고 시녀들에게도 무장을 시키는 여걸이긴 했으나 적벽대전에서 활약하진 않았습니다. 사실 애당초 그녀가 삼국지에 나오게 된 원인인 이 거짓 혼인 계교를 짜낸 사람이 바로 주유인데, (이 에피소드가 적벽대전이 끝난 후에 나온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만약 그런 에피소드를 넣어버리면 영화 <적벽대전>에서 추구하는 대인배 주유의 모습을 그리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는 유비를 쬬다로 그리고 싶거든요. 그럼 답은 무엇이냐? 유비와 손상향의 혼인 같은 건 아예 있지도 않은 일로 해버리는 겁니다. 이러면 주유의 소인배스러운 계교도 묻히고, 유비 같은 쬬다에게 우리의 소중한 손상향을 줄 일도 없어지고, 손상향은 손상향대로 무를 좋아하는 여성이므로 적당하게 영화에 쓸만한 캐릭터로 쓸 수 있게 됩니다. 오나라 띄워주기가 목표인 영화인만큼 그녀 같은 여걸을 안 쓸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그냥 손상향이 나오기만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뭔가 러브라인 정도는 넣어야 영화가 좀더 감칠맛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손상향을 적진에 잠입시키고, 거기에서 만난 병사와 훈훈한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대체 조조군에는 여자가 남자 옷 좀 걸치고 돌아다닌다고 여자인줄도 몰라보는 동태눈 병사들만 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일단 넘어갑시다. 넘어가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저처럼 보면서 "시나리오를 술먹고 발로 썼냐?" 라며 투덜거리게 됩니다. 그리고 뭐, 어쨌든 적군 병사와 만났으니 나중에 전장에서 한 번 재회해야죠. 그러나 우리는 서로 적군인 사이, 전장에서 만나면 한 쪽은 죽기 십상이지요······ 아니 대체, 그런 식으로 재회를 시키면 뭔가 좀 더 센스있게 해주든가 해야지, 아는 사람 만났다고 옆에서 다들 죽어나가는 전쟁판에서 대열에서 이탈해 적군에게 뛰어드는 철부지 아가씨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이며, (친구 만났다고 좋아하다 죽는 그 적군 친구는 원래 캐릭터가 바보로 나왔으니 그렇다 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전쟁터에서 "목마 태워 줄까?"라는 대사를 칠 줄 아는 목마 한 잔의 여유라니, 이거 좀 불후의 명대사) 덕분에 친구가 죽은 후에 정말 오랫동안 슬픔을 음미할 시간을 준다는 건 또 뭔지. 아니 전쟁터잖아. 옆에서 칼부림이 일어나는데 친구가 죽었다고 슬픔을 음미하고 있으면 아무도 안 덤비는 거야? 그럼 난 전쟁터에 나가서 슬픈 얼굴로 친구를 애도하고만 있으면 절대 화살 하나 안 맞을 수 있는 거냐? 상황을 만드려면 좀 더 세련되게 못하냐.
그리고 소교: 이건 참 한숨이 나옵니다. 소교 역을 맡은 린즈링은 예뻤지만, 얼굴만 예쁘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요소요소마다 적절히 튀어나와서 영화 몰입을 막아 주는 아주 멋진 캐릭터였죠. 사실 1부에서는 꽤 괜찮았고, 2부에서도 초반까지는 꽤 괜찮았는데······ 우리의 멋진 영웅 주유의 아내님이니까 조금쯤 띄워주는 건 이해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는 바로 그 밤에 조조를 찾아가는 건 정말 "저게 뭔 개짓거리야?"라는 말이 안 튀어나올 수 없게 하더군요. 조조가 소교 빼앗으러 이 전쟁 일으켰다는 썰은 어디까지나 주유를 격동시켜 오나라를 이 전쟁에 참전하게 하려는 제갈량의 계교였고 원래의 삼국지에서 소교의 비중은 그 정도였다······ 는 거야 그렇다치고, 그걸 아주 본격적으로 구도화시켜서 이젠 소교야말로 자기 한 몸 희생하여 전쟁을 막으려는 여걸이 되었더군요. 네, 시도는 참 좋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셔야지요. 일이 그렇게까지 벌어져 있는데 여자 한 명 얻었다고 전쟁 멈추고 돌아가면 조조 부하들이 참 조조 잘 따르겠습니다. 이건 자기 희생이 아니라 그냥 병신짓이죠. 우아하고 기품있던 주유의 아내님은 그 순간 그냥 생각 없는 병신이 된 겁니다. 게다가 떠나면서 주유에게 편지를 남기는데, 그게 또 걸작. "말 안 하고 있었지만 실은 저 아기 가졌어요" 유부녀킬러 조조한테 떠나면서 주유한테 그거 말해주면 주유가 참 사기 잘도 오르겠다······ 아니 뭐 몸 건강히 돌아오겠다고? 임신한 채로 조조하고 밤을 같이 지새우고 아기 유산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다. 그나마 영화가 성적인 부분으로는 어린이 관람가 수준이라 무사히 넘어갔지, 이건 대체 생각이 있는 여자의 행동인지 참으로 의심스러웠습니다. 그 후로는 소교가 뭘 하든 그냥 짜증. 손상향도 그렇고 소교도 그렇고, 오나라 여자들 왜 이래? 시나리오 쓴 놈은 지금 이것들을 멋있다고 집어넣은 거야?
더불어, 오나라를 강조하고 주유를 멋지게 만드려다 보니 유비군 쪽은 바보가 됩니다. 인기가 워낙 좋은 제갈량이나 조자룡, 관우 등은 차마 건드리지 못하지만, 장비는 좀 더 얼간이같이 되고, 유비는 그냥 쬬다가 되어버립니다. 조조의 열병 공격으로 군사들이 죽어나가자 유비 왈 "병사들을 더 이상 죽일 수 없습니다. 난 이미 너무 많이 패했어요. 더 이상 패해선 아니됩니다." 라면서 동맹 파기, 퇴각. 아놔, 아무리 유비를 싫어해도 그건 아니지. 나도 유비를 안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유비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한단 말이야. 게다가 그 사람은 인의를 컨셉으로 삼고 살아가는 남자고, 애당초 장판파에서 대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인의 컨셉 버리면 자기는 죽는다는 거 아니까 백성 끌어안고 후퇴하려다 깨진 건데, 그 상황에서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캐릭터가 된다고? 그게 말이 되냐? 혹자는 나중에 주유가 동맹군을 기다린다면서,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죠"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고 "아니 그게 아니라 유비와 미리 짜고서 그렇게 보이도록 한 거야"라고 말합니다만, 그렇다면 유비에게 관우와 장비 조자룡 등이 정색하고 반항한 이유와, 제갈공명이 나중에 주유에게 "친구를 믿는다면 어쩌구저쩌구하십시오 (이거 대사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라고 말한 이유가 제대로 설명이 안 됩니다. 정말 작당한 것이라면 공명이 주유에게 "믿는다면" 이라는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볼 때 그건 "주유가 워낙 대인배라서 기다려주고 또한 감싸줄 줄 안다"고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라고 봅니다.
여하간 그런 식으로, 유비군 비중을 축소시키려다 보니, 적벽대전의 명장면 중 또 하나인 조조가 퇴각하면서 "깔깔깔깔 이 어리석은 주유놈 제갈량놈, 나라면 여기다 군사를 매복해뒀을 텐데, 그러면 우린 도망 못 갔을 텐데 하하하" 하자마자 "조자룡 여기 있다" "장익덕이 여기 있다" "관운장이 여기서 기다렸다" 라고 세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 크고 아름다운 장면이 삭제되어버립니다. 대신에 어떤 식이냐, 생각 없이 적진에 뛰어들었던 소교가 위험에 처하고 인질이 되니 주유가 그녀를 어찌어찌 무협처럼 바람같이 구하고 난 뒤에 나름대로 멋져 보이겠답시고 "가시오, 당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시오" 라면서 그냥 조조 보내줍니다······ 이건 무슨 개짓거리야. 삼국지연의에서 관우가 조조 그냥 보내주는 이유도 그나마 관우가 전에 조조의 은혜를 받은 적이 있어서 그걸 갚느라 그런 (것이라고 나관중이 열심히 설정해놓은) 것인데, 주유는 대체 조조를 그 상황에서 안 잡을 이유가 어디 있다고 그냥 보내나. 대체 이놈이 지금 전쟁을 한다는 자각이 있긴 했던 건가. ······여하간 그리하여 주유가 그렇게 보내는 동안 우리의 유비군들은 그냥 멀거니 떠나는 조조를 바라봅니다.
이 쯤 되면, 원래 거기서 안 죽어야 할 장군이 죽는다는 식으로 생사까지 바뀌거나 (지못미 감X), 노구에 몸을 아끼지 않고 매를 맞고 거짓 투항하여 적벽의 밤을 화공으로 불태우는 멋진 남자였던 황개가 주유의 "아니 그럴 필요없소" 한 마디에 그냥 엑스트라가 됐다거나 하는 건 이젠 이야깃거리도 못 되는 거죠······ 이건 무슨, 삼국지를 가지고 만든 영화인 주제에 삼국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열받는 영화고. 적벽대전 하면 생각나는 신들은 다 빼먹은 주제에 쓰잘데기없는 신이나 집어넣고. 그런 거 집어넣고 영상만 그럴듯하게 표현해주면 관객들이 감동할 줄 아냐. 아니 하다못해, 네 마음대로 삼국지 동인지를 만들고 그걸 보여줄 거였으면 이야기라도 좀 더 말이 되게 해놔야 받아주지. 이건 뭐 감동도 없고, 전개방식은 쌍팔년도 홍콩영화고.
······원래 있는 주유의 좀 찌질한 면은 다 삭제되었다는 부분은 넘어갑시다. 이 영화는 주유를 대인배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영화이므로, 제갈량 죽이고 싶어서 "공명아 공명아 / 화살 십만 개 내놓아라 / 그러지 않으면 / 구워서 먹으리" 하는 부분이 왠일인지 당신은 화살을 내놓고 나는 채모와 장윤을 처치하도록 계교 대결을 펼쳐봅시다 하는 뉘앙스로 바뀌어 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넘어가줘야 합니다. 제갈량을 질투해서 죽이고 싶어하는 부분이 사실 개인적으로는 주유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주유는 제갈량의 멋진 호적수임 ㄳ"라고 보여주고 싶어서 애쓰더군요. 마지막 장면에선 조금만 가까이 다가서면 키스도 할 만한 거리에서 제갈량이 애틋한 눈빛으로 "당신은 제가 가장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라는 식의 이야기도 해주고······ 이건 사실 그것만으로는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닌데, 위에서 설명했듯 영화 자체의 스토리가 전반적으로 재앙 저질 막장이다보니 여기서도 그냥 헛웃음이 나와버립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영상에만 돈 때려박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니까. "승자가 없는 전쟁" 좋아하네. "승자가 없는 영화"다.
결론. 이 영화에서 만족할만한 부분은 전투신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위에서 적은 저 쓸데없는 헛질을 하느라 러닝타임을 잡아먹어서, 전투신은 의외로 좀 짧습니다. 솔직히 이거 DVD 보는 거였으면 챕터 다 뛰어넘겨버리고 마지막 전투신만 봤을 겁니다. 원작 스토리를 바꾸는 거야 원작 자체도 원래 소설이니까 좀 바꾸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바꾼 스토리가 도대체 저질이라 짜증이 납니다.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내놓으려면 좀 제대로 만들 것이지.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이건 삼국지 영화 아니다. 삼국지 캐릭터 가지고 만든, 저질 스토리 동인지다"라는 점을 아주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양조위, 금성무 / 오우삼
글렀습니다. 이 영화는 글렀습니다. 전편인 <적벽대전 1>을 보았을 때 저는 "오 멋진데? 좀 주유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편성하긴 했지만 적벽대전은 사실 오나라가 중심이니까 괜찮은 해석이지. 사실 난 오나라 좋아하기도 하고."라고 생각하고 2를 기대했습니다만, 이번에 개봉해서 정작 보고 나니 처참하더군요. 영상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어느 쪽이냐면 상당히 잘 만들었습니다. 연출력도 좋아요. 하지만 영화는 영상만 보고 마는 물건이 아니지요. 영상을 받쳐주는 스토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니 저게 무슨 개짓거리야?"라는 말이 수십 번이나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습니다. 영화 진짜 못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의도에 따라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를 재편성하는 중에 캐릭터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으며 리얼리티도 현저하게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죠.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삼국지연의를 가지고 만든 영화를 두고 스포일러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정말 말 그대로 스포일러가 됩니다)
이 영화는 주유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적벽대전입니다. 그 점에 저는 이견이 없으며, 사실 주유를 멋지게 그려낼 수 있다면 그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애당초 전 삼국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손견이고 그가 세운 오나라도 꽤 좋아해요. 오나라가 중심이 된다고 해서 불만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문제가 있는데, 그건 지나치게 영화의 포커스를 주유 대인배화에 맞추고, 오나라가 주역이 되도록 만드느라 삼국지의 구조 자체를 바꿔버렸기 때문입니다. 바꿨으면 세련되게 바꾸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 바꾼 방식도 저질입니다. 욕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전 이 영화 보면서 좀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열심히 빈정거릴 터라, 이 영화가 마음에 드신 분들은 이 감상을 안 읽으시는 쪽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손상향 (손권의 여동생)과 소교 (주유의 부인)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원래 그녀들은 삼국지연의 원작에서는 거의 비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비중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에서처럼 활약하진 않죠.
우선 손상향: 본래 그녀는 감부인을 잃은 유비에게 (거짓으로) 새 장가를 들도록 해서 오나라로 데리고 와 죽이려는 간계로서 이용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이어야 할) 혼인을 손권의 어머니인 오국태 부인이 알게 되어, 딸을 궤계에 사용한다는 데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그녀가 유비를 실제로 보고 마음에 들어해버린 탓에 진짜 혼인이 되어버리는 에피소드가 있죠. (그 후에도 이야기가 좀 더 있지만 여하간 그런 정도) 여하간 본래 손상향은 그러한 인물이며, 실제로 무 (武)를 좋아하고 시녀들에게도 무장을 시키는 여걸이긴 했으나 적벽대전에서 활약하진 않았습니다. 사실 애당초 그녀가 삼국지에 나오게 된 원인인 이 거짓 혼인 계교를 짜낸 사람이 바로 주유인데, (이 에피소드가 적벽대전이 끝난 후에 나온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만약 그런 에피소드를 넣어버리면 영화 <적벽대전>에서 추구하는 대인배 주유의 모습을 그리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는 유비를 쬬다로 그리고 싶거든요. 그럼 답은 무엇이냐? 유비와 손상향의 혼인 같은 건 아예 있지도 않은 일로 해버리는 겁니다. 이러면 주유의 소인배스러운 계교도 묻히고, 유비 같은 쬬다에게 우리의 소중한 손상향을 줄 일도 없어지고, 손상향은 손상향대로 무를 좋아하는 여성이므로 적당하게 영화에 쓸만한 캐릭터로 쓸 수 있게 됩니다. 오나라 띄워주기가 목표인 영화인만큼 그녀 같은 여걸을 안 쓸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그냥 손상향이 나오기만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뭔가 러브라인 정도는 넣어야 영화가 좀더 감칠맛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손상향을 적진에 잠입시키고, 거기에서 만난 병사와 훈훈한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대체 조조군에는 여자가 남자 옷 좀 걸치고 돌아다닌다고 여자인줄도 몰라보는 동태눈 병사들만 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일단 넘어갑시다. 넘어가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저처럼 보면서 "시나리오를 술먹고 발로 썼냐?" 라며 투덜거리게 됩니다. 그리고 뭐, 어쨌든 적군 병사와 만났으니 나중에 전장에서 한 번 재회해야죠. 그러나 우리는 서로 적군인 사이, 전장에서 만나면 한 쪽은 죽기 십상이지요······ 아니 대체, 그런 식으로 재회를 시키면 뭔가 좀 더 센스있게 해주든가 해야지, 아는 사람 만났다고 옆에서 다들 죽어나가는 전쟁판에서 대열에서 이탈해 적군에게 뛰어드는 철부지 아가씨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이며, (친구 만났다고 좋아하다 죽는 그 적군 친구는 원래 캐릭터가 바보로 나왔으니 그렇다 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전쟁터에서 "목마 태워 줄까?"라는 대사를 칠 줄 아는 목마 한 잔의 여유라니, 이거 좀 불후의 명대사) 덕분에 친구가 죽은 후에 정말 오랫동안 슬픔을 음미할 시간을 준다는 건 또 뭔지. 아니 전쟁터잖아. 옆에서 칼부림이 일어나는데 친구가 죽었다고 슬픔을 음미하고 있으면 아무도 안 덤비는 거야? 그럼 난 전쟁터에 나가서 슬픈 얼굴로 친구를 애도하고만 있으면 절대 화살 하나 안 맞을 수 있는 거냐? 상황을 만드려면 좀 더 세련되게 못하냐.
그리고 소교: 이건 참 한숨이 나옵니다. 소교 역을 맡은 린즈링은 예뻤지만, 얼굴만 예쁘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요소요소마다 적절히 튀어나와서 영화 몰입을 막아 주는 아주 멋진 캐릭터였죠. 사실 1부에서는 꽤 괜찮았고, 2부에서도 초반까지는 꽤 괜찮았는데······ 우리의 멋진 영웅 주유의 아내님이니까 조금쯤 띄워주는 건 이해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는 바로 그 밤에 조조를 찾아가는 건 정말 "저게 뭔 개짓거리야?"라는 말이 안 튀어나올 수 없게 하더군요. 조조가 소교 빼앗으러 이 전쟁 일으켰다는 썰은 어디까지나 주유를 격동시켜 오나라를 이 전쟁에 참전하게 하려는 제갈량의 계교였고 원래의 삼국지에서 소교의 비중은 그 정도였다······ 는 거야 그렇다치고, 그걸 아주 본격적으로 구도화시켜서 이젠 소교야말로 자기 한 몸 희생하여 전쟁을 막으려는 여걸이 되었더군요. 네, 시도는 참 좋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셔야지요. 일이 그렇게까지 벌어져 있는데 여자 한 명 얻었다고 전쟁 멈추고 돌아가면 조조 부하들이 참 조조 잘 따르겠습니다. 이건 자기 희생이 아니라 그냥 병신짓이죠. 우아하고 기품있던 주유의 아내님은 그 순간 그냥 생각 없는 병신이 된 겁니다. 게다가 떠나면서 주유에게 편지를 남기는데, 그게 또 걸작. "말 안 하고 있었지만 실은 저 아기 가졌어요" 유부녀킬러 조조한테 떠나면서 주유한테 그거 말해주면 주유가 참 사기 잘도 오르겠다······ 아니 뭐 몸 건강히 돌아오겠다고? 임신한 채로 조조하고 밤을 같이 지새우고 아기 유산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다. 그나마 영화가 성적인 부분으로는 어린이 관람가 수준이라 무사히 넘어갔지, 이건 대체 생각이 있는 여자의 행동인지 참으로 의심스러웠습니다. 그 후로는 소교가 뭘 하든 그냥 짜증. 손상향도 그렇고 소교도 그렇고, 오나라 여자들 왜 이래? 시나리오 쓴 놈은 지금 이것들을 멋있다고 집어넣은 거야?
더불어, 오나라를 강조하고 주유를 멋지게 만드려다 보니 유비군 쪽은 바보가 됩니다. 인기가 워낙 좋은 제갈량이나 조자룡, 관우 등은 차마 건드리지 못하지만, 장비는 좀 더 얼간이같이 되고, 유비는 그냥 쬬다가 되어버립니다. 조조의 열병 공격으로 군사들이 죽어나가자 유비 왈 "병사들을 더 이상 죽일 수 없습니다. 난 이미 너무 많이 패했어요. 더 이상 패해선 아니됩니다." 라면서 동맹 파기, 퇴각. 아놔, 아무리 유비를 싫어해도 그건 아니지. 나도 유비를 안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유비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한단 말이야. 게다가 그 사람은 인의를 컨셉으로 삼고 살아가는 남자고, 애당초 장판파에서 대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인의 컨셉 버리면 자기는 죽는다는 거 아니까 백성 끌어안고 후퇴하려다 깨진 건데, 그 상황에서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캐릭터가 된다고? 그게 말이 되냐? 혹자는 나중에 주유가 동맹군을 기다린다면서,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죠"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고 "아니 그게 아니라 유비와 미리 짜고서 그렇게 보이도록 한 거야"라고 말합니다만, 그렇다면 유비에게 관우와 장비 조자룡 등이 정색하고 반항한 이유와, 제갈공명이 나중에 주유에게 "친구를 믿는다면 어쩌구저쩌구하십시오 (이거 대사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라고 말한 이유가 제대로 설명이 안 됩니다. 정말 작당한 것이라면 공명이 주유에게 "믿는다면" 이라는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볼 때 그건 "주유가 워낙 대인배라서 기다려주고 또한 감싸줄 줄 안다"고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라고 봅니다.
여하간 그런 식으로, 유비군 비중을 축소시키려다 보니, 적벽대전의 명장면 중 또 하나인 조조가 퇴각하면서 "깔깔깔깔 이 어리석은 주유놈 제갈량놈, 나라면 여기다 군사를 매복해뒀을 텐데, 그러면 우린 도망 못 갔을 텐데 하하하" 하자마자 "조자룡 여기 있다" "장익덕이 여기 있다" "관운장이 여기서 기다렸다" 라고 세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 크고 아름다운 장면이 삭제되어버립니다. 대신에 어떤 식이냐, 생각 없이 적진에 뛰어들었던 소교가 위험에 처하고 인질이 되니 주유가 그녀를 어찌어찌 무협처럼 바람같이 구하고 난 뒤에 나름대로 멋져 보이겠답시고 "가시오, 당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시오" 라면서 그냥 조조 보내줍니다······ 이건 무슨 개짓거리야. 삼국지연의에서 관우가 조조 그냥 보내주는 이유도 그나마 관우가 전에 조조의 은혜를 받은 적이 있어서 그걸 갚느라 그런 (것이라고 나관중이 열심히 설정해놓은) 것인데, 주유는 대체 조조를 그 상황에서 안 잡을 이유가 어디 있다고 그냥 보내나. 대체 이놈이 지금 전쟁을 한다는 자각이 있긴 했던 건가. ······여하간 그리하여 주유가 그렇게 보내는 동안 우리의 유비군들은 그냥 멀거니 떠나는 조조를 바라봅니다.
이 쯤 되면, 원래 거기서 안 죽어야 할 장군이 죽는다는 식으로 생사까지 바뀌거나 (지못미 감X), 노구에 몸을 아끼지 않고 매를 맞고 거짓 투항하여 적벽의 밤을 화공으로 불태우는 멋진 남자였던 황개가 주유의 "아니 그럴 필요없소" 한 마디에 그냥 엑스트라가 됐다거나 하는 건 이젠 이야깃거리도 못 되는 거죠······ 이건 무슨, 삼국지를 가지고 만든 영화인 주제에 삼국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열받는 영화고. 적벽대전 하면 생각나는 신들은 다 빼먹은 주제에 쓰잘데기없는 신이나 집어넣고. 그런 거 집어넣고 영상만 그럴듯하게 표현해주면 관객들이 감동할 줄 아냐. 아니 하다못해, 네 마음대로 삼국지 동인지를 만들고 그걸 보여줄 거였으면 이야기라도 좀 더 말이 되게 해놔야 받아주지. 이건 뭐 감동도 없고, 전개방식은 쌍팔년도 홍콩영화고.
······원래 있는 주유의 좀 찌질한 면은 다 삭제되었다는 부분은 넘어갑시다. 이 영화는 주유를 대인배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영화이므로, 제갈량 죽이고 싶어서 "공명아 공명아 / 화살 십만 개 내놓아라 / 그러지 않으면 / 구워서 먹으리" 하는 부분이 왠일인지 당신은 화살을 내놓고 나는 채모와 장윤을 처치하도록 계교 대결을 펼쳐봅시다 하는 뉘앙스로 바뀌어 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넘어가줘야 합니다. 제갈량을 질투해서 죽이고 싶어하는 부분이 사실 개인적으로는 주유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주유는 제갈량의 멋진 호적수임 ㄳ"라고 보여주고 싶어서 애쓰더군요. 마지막 장면에선 조금만 가까이 다가서면 키스도 할 만한 거리에서 제갈량이 애틋한 눈빛으로 "당신은 제가 가장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라는 식의 이야기도 해주고······ 이건 사실 그것만으로는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닌데, 위에서 설명했듯 영화 자체의 스토리가 전반적으로 재앙 저질 막장이다보니 여기서도 그냥 헛웃음이 나와버립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영상에만 돈 때려박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니까. "승자가 없는 전쟁" 좋아하네. "승자가 없는 영화"다.
결론. 이 영화에서 만족할만한 부분은 전투신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위에서 적은 저 쓸데없는 헛질을 하느라 러닝타임을 잡아먹어서, 전투신은 의외로 좀 짧습니다. 솔직히 이거 DVD 보는 거였으면 챕터 다 뛰어넘겨버리고 마지막 전투신만 봤을 겁니다. 원작 스토리를 바꾸는 거야 원작 자체도 원래 소설이니까 좀 바꾸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바꾼 스토리가 도대체 저질이라 짜증이 납니다.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내놓으려면 좀 제대로 만들 것이지.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이건 삼국지 영화 아니다. 삼국지 캐릭터 가지고 만든, 저질 스토리 동인지다"라는 점을 아주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