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
영국왕립무기박물관, DK <무기> 편집위원회 지음, 정병선, 이민아 옮김, 리처드 홈 감수/사이언스북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돌도끼에서 기관총까지 무기 대백과사전'. 말 그대로 이 책은 무기 대백과사전입니다. 전세계, 고대-중세-근세-혁명의 시대-현대를 거치는 시기 동안 사용된 무기와 갑주 등을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저 단지 무기만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무기가 사용된 시대의 상황에 대해서도 중간중간 서술이 붙어있어 지식 습득에 보다 도움이 되죠.

 이런 책은 사실 저처럼 쓰려는 글에 무기를 서술할 필요가 있는 사람인 경우 확실히 유용합니다. 시대와 장소별로, 어떤 무기가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어떤 무기 다음에 어느 무기가 나와야 옳은지 알 수 있게 해주거든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무기가 등장하거나, 그 무기 전에 개발되었어야 할 것이 나와있지 않은데도 특정 무기가 나와버리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큼직한 책에 담겨진 큼직한 사진, 그리고 충분히 도움이 되는 해설과 무기의 제원


 그리고 저와 같이 특정 용도로 이용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해도, 이 책은 '문명'을 이해하는 데에 또한 도움이 됩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싸움이 있기 마련이고, 전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 쓰여진 도구는 문명의 발전에 따라 점점 향상되어갔죠. 특정한 소재 (돌, 나무, 청동, 철)가 필요하고 그것을 다루는 기술의 발전이 필요합니다. 이 책의 순서를 따라 무기의 발전을 읽다 보면 그 무기가 사용되고 있는 시대도 같이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제 다른 역사책에서 전쟁을 읽을 때에 그 전쟁의 형태가 어떠했으며 그때의 전술이 어떤 식이고 왜 그런 식이어야 했는지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죠.

 그런 책입니다. 전쟁이나 무기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사서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유일한 단점은 가격이 좀 세다는 건데, 300x250mm의 사이즈에 360페이지인데 올컬러라는 걸 감안하면 투자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되네요.
Posted by Neissy
리틀 슬립
폴 트렘블레이 지음, 이소은 옮김/비채

 여기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 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세속에 물들지도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 그러나 사고로 인해 육체에 대한 정상적인 통제력을 잃었고 사회의 어둠을 파헤치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건사하기조차 버거운 사람. 그가 바로 폴 트렘블레이가 창조한 마크 제네비치입니다.

 그냥 봐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제목인 <리틀 슬립>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표지의 남자는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크 제네비치라고 하긴 좀 무리가 있는데, 그는 사고로 인해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피카소가 그린 얼굴보다 더 엉망이' 되도록) 망가진 얼굴을 중절모와 수염으로 가리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표지의 이 남자는 지나치게 멋있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오마주를 드러내는 작품은 대개 일반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결코 동경의 대상이 된 작품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많은 소설들에 'ㅇㅇ를 능가하는 ㅁㅁ'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그런 식으로 광고를 붙이는 시점에서 이미 누구나 그 소설이 원전보다 뛰어나지 못함을 알게 되죠. 아주 간혹,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요.

 한 가지 질문이 생기죠: <리틀 슬립>은 어떤 작품인가? <빅 슬립>보다 뛰어난가? (어떠한 소설을 다른 소설과 이렇게 비교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지만, 제목부터 이렇게 유사하게 달고 나온 이상 마음속으로 비교해버리게 되는 것도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안타깝다면 안타깝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습니다만, <빅 슬립>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소박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듭니다. 물론 레이먼드 챈들러로부터 온 하드보일드의 감성- 생생하게 묘사된 어두운 사회, 살아 숨쉬는 인물들, 모두가 썩어 있는 중에도 도덕을 추구하는 주인공 등은 확실히 나타나고 있지만, 더 화끈하다거나 혹은 더 깊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지는 않아요.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리틀 슬립>은 단지 레이먼드 챈들러를 존경한 사람이 그런 풍으로 써내었을 뿐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명성에 기대는 그저 그런 작품인가? 그건 또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리틀 슬립>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것은 바로 제목이기도 한 '리틀 슬립'- 즉 기면증 (嗜眠症, narcolepsy)입니다. 기면증이란 간단히 말하면 깨어 있는 중에 돌연 참을 수 없는 수면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잠이 드는 순간이나 혹은 깨어나는 순간 환상을 보게도 되고 (입면 또는 각성 환각), 의식은 깨어있으되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게도 됩니다 (수면 마비). 주인공 마크 제네비치는 사고로 인해 기면증이 생겼고, 그래서 자신의 육체조차 제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소설 내에서, 바로 위에서 설명한 모든 증상들이 그에게 엄습합니다. 자기 자신과도 싸워 이기기 힘든 한 남자가 사회의 악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이것이 <리틀 슬립>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냅니다.

 기면증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만들어갑니다. 그는 환상과 맞서 싸워야 하고, 중요한 순간 잠들어버리는 것에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는 의뢰를 받고 사건을 해결하는 사립탐정입니다. 그러나 기면증으로 인해 찾아오는 환상은 그에게 사건이 어떻게 되어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듭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항상 최악의 순간은 정신이 들고 난 바로 다음이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따위의 질문을 비웃고는 싶은데, 나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생각해서 잘못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일들'을 바탕으로 움직여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 잠들어버릴지 모르고 그것이 일을 심각하게 망쳐놓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어쨌거나 포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요.

 마크 제네비치는 필립 말로에 비하자면, 솔직히 멋이 없습니다. 미덥지도 않습니다. 표지의 남자와는 백만 광년쯤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액션 영웅이 아니며 인터넷에서 데이터베이스나 찾는 그저 그런 탐정에 불과합니다. 기면증 발작은 계속해 그에게 달려들며 일을 망쳐놓도록 유도합니다. 그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필립 말로는 자기 자신은 믿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마크 제네비치는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싸워나갑니다. 기면증에 대항해, 어떤 불합리에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했으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게 마크 제네비치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사건의 진실 자체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크 제네비치가 헤쳐나가는 그 모든 '현실'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런 데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리틀 슬립>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겁니다.
Posted by Neissy

 어제 폭설이 내리고, 오늘 거리를 보면 거의 눈이 녹았지만 일부 낮에도 그늘인 지역은 눈이 녹지 않고 빙판길이 되어버린 구역이 좀 있었습니다. 빙판길이란 즉 극도로 미끄러지기 쉬운 구역이며, 덧붙여 저는 평소에 리복 워킹화를 신고 다니는데 이게 신발의 독특한 구조상 (앞꿈치와 뒤꿈치가 지면에 딱 달라붙지 않고 볼록하게 튀어나와 의도적인 불균형을 의도함으로 균형감각과 근력을 좀 더 이용하게 만듭니다. 그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에어가 들어간 부분인지라 쿠셔닝은 아주 좋지만요) 마찰계수가 낮아지면 꽤 쉽게 미끄러지는 신발입지요. 즉 이 신발을 신고 빙판 위에 올라서면 아무래도 불안정해진다는 뜻입니다.

 말인즉슨, 그동안 수련한 보법을 써먹을 기회였다는 것이지요 ←

 원래가 영춘권의 보법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써먹을 수 있게 고안된 보법입니다. 발을 거의 바닥에 달라붙어서 이동하는 탓에, 오히려 마찰계수가 높은 지역에서는 매끄럽게 움직이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빙판이라면, 이건 말 그대로, 배운 무술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기™에 최적의 상황 아니겠습니까?

 결과: 중심축을 신체 하부로 내리면서 두 발을 바닥에서 거의 떼지 않고 이동하는 영춘권의 보법은 빙판길에서 매우 유효함을 확인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오오 하나도 안 불안정해! 보법 최고!"(속으로) 외치며 빙판길 위에서 혼자 희희낙락할 만큼 유효했습지요. 빙판에서 미끄러지는 신발 신은 주제에 빙판길을 반겼달까 뭐랄까.

 아무튼 이런 식으로도 뭔가 옛날보다 발전했다는 느낌을 받으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요.
Posted by Neissy

 폭설이 내린다고 해도 도장에는 가야겠다며 버스를 기다렸는데 이 버스가 30분이 지나도 안 오고, 타는 데만 이렇게 늦어지면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말도 안 되게 걸리겠다 싶어 (원래는 일하러 다니는 학교 앞에서 고속버스를 타면 남부터미널까지 한 시간 좀 넘게 걸려 도착합니다. 그러니까 집은 화성이라도 일하는 곳은 평택이니까) 결국 포기하고 집에 가려 하는데 집에 가는 버스도 30분이 넘도록 안 오고. 이놈의 눈이 진정으로 저주스러운 저녁이었습니다.

 그나마 수요일하고 토요일밖에 못 가는 걸 지난 토요일은 일 때문에 못 가서 오늘은 꼭 가려 했는데 또 이런 식으로 못 가니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오는군요. 솔직히 말하면 돌아오며 기분 참 극도로 저기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난 니네들이 죽도록 증오스럽다고 이 똥덩어리놈들아.


 집에서 소념두나 연환충권이나 보법은 계속 하고 있지만 정작 도장을 이렇게 못 나가면 참 난감합니다. 뭐 이렇게 자꾸 사정이 생기는지. 쯧.
Posted by Neissy